아무도 모른다/2006.01 ~ 2006.12

2006년 2월 22일, 아침이 밝아오는 순간

dancingufo 2006. 2. 22. 15:15


아무렇지 않고 싶었어. 흔한 열정이 유일한 것인 양 목을 매지 않겠다고 생각했지. 나는 어느 새 믿음을 잃어버린 내 마음을 보았어. 내가 당신을 믿었던가? 내가 당신들을 믿었던가? 이상한 일이지. 당신들은 늘 나를 이렇게 실망시키고 슬프게 하는데도 나는 믿음을 잃어버린 내 마음이 미안했어. 미안해서 울고 싶었어.

라울은 달리고 있었지. 긴 부상 끝에 라울은 드디어 그 자리에 돌아와 있었어. 아무렇게나 자라버린 까만 머리카락은 더 이상 라울 곤잘레스를 소년으로 보이지 않게끔 만들었지. 나는 좁은 그 어깨가, 수척한 그 얼굴이, 근심이 드리워진 그 검은 속눈썹이, 너무나 초라해 보여서 속이 상했어. 패배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동료들을 바라보고 있었거든. 절대로 멈춰서는 법이 없던 라울 곤잘레스도, 패배에 가까워지고 있는 제 동료들을 볼 때는 달리는 것도 잊고 있었거든.

얼마만에 마주치는 일일까. 나는 그라운드 위로 들어서는 라울을 보고 있었어. 그 모습을 보면서 여전히 아플지도 모르는 그 육체를 걱정했지. 어쩌면 라울 곤잘레스가 달리지 않는 것이 나에게 더 위안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어. 난 라울이 패배하게 되는 것이 싫었어. 팀에게, 팬들에게, 저 자신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지 못하는 라울이란 너무 힘이 들었어.

우리가 승리하지 못할 거란 걸 예감했지. 아프던 목이, 어깨가, 두 팔이 긴장을 잃고 순식간에 졸음이 몰려왔어. 여전히 열심히 달리고 있는 데이비드 베컴을 보면서, 그가 놓쳐버린 최고의 찬스를 바라보면서, 그냥 웃었지. 괜찮아.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거 알아. 당신이 좋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해. 그래서 나는 그냥 웃었어. 패배가 아무렇지 않았던 건 아니야. 나는 슬펐어. 눈물이 났지. 이런 것을 좋아하는 내가 싫었어. 어째서 나는 이렇게 승리 따위에 집착해야 하는 걸까. 자문하며 TV를 껐지. 상대의 승리를 축하해주며, 상대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미소짓는 라울이 카메라에 잡혀 있었어. 늘, 지나치게 정중하기만 한 저 모습이 괴로운 것 같아. 하지만 난 그런 그 모습을 너무나 좋아했지.

어둔 방으로 돌아와 다시 침대에 누웠어. 라울은 너무나 아름다워. 그는 매우 훌륭하지. 그런데도 내가 좋아한 이후의 라울 곤잘레스는 단 한번도 챔피언이 되지 못했어.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이 억울해졌지. 축구란 건 늘 이렇게 나를 부당한 억울함에 빠지게 만들어. 그런데도 나는 왜 그 억울함에서 구원받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걸까. 어째서 이것에 대하여 좀 더 냉소적으로 변할 수 없는 걸까. 괴로운 일이야. 아침이 밝아오는 순간에 맞는 이런 패배같은 것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