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른다/2006.01 ~ 2006.12
2006년 3월 30일, 엄마
dancingufo
2006. 3. 31. 00:57
01.
엄마가 다녀갔다. 그런데도 별로 해줄 게 없어서 마음이 불편했다. 자기 전에 침대에 누운 엄마가, 입었던 옷을 벗어서 내게로 쓱- 던져놓으며 말했다.
"좀 개라. 예전에 내가 많이 개줬잖아."
나는 빨래를 보기 좋게 개는 재주가 없었다. 그래서 싫어하고, 내 것이 아니면 개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내게 툭 던져지는 티셔츠에 짜증을 좀 내려다가, 뒤이은 엄마의 말에 아무런 대꾸를 못했다. 하긴, 예전에 엄마가 많이 해줬지. 지겹도록 참 많이도 해줬지. 그런 생각을 하면 애를 넷 키운 엄마가 무슨 대단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신기하기도 하고, 때로는 좀 진저리처지기도 하고.
02.
나는 엄마를 좋아했다. 그냥 나와 다른 하나의 인간으로 보면 뭐 그리 좋을 데가 있겠냐마는, 그냥 내 엄마라는 존재는 꽤 좋아해왔다. 엄마가 살아온 삶이나 엄마의 행동, 나를 대하는 태도 같은 것이 아니라 그냥 엄마라는 사람. 내 엄마라는 이 사람. 바로 이 사람을 그냥 좋아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엄마와 떨어져 산 지 여러해 되었고, 그 여러해가 지나는 동안 나와 엄마는 별로 친하지 않은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엄마와 단 둘이 있으면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다른 가족 구성원에 대한 이야기 말고는 화젯거리를 찾을 수도 없었고, 공통된 관심사도 없었으며, 서로의 안부 같은 것은 별로 묻고 싶지 않아했다. 그래서 우리는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냥, 조용히, 말 없이 말이다.
03.
나는 막내딸로 자랐다. 세 딸 중에선 아마 엄마 손을 가장 많이 탄 딸이었을 것이다. 엄마가 한 번도 다른 곳에 맡기지 않고, 계속해서 키운 딸도 나뿐이라고 그랬다. 나는 엄마 등에서 내려놓으면 많이 우는 딸이었다고. 그래서 다른 곳에 맡길 수가 없었다고.
나이가 든 후로는 엄마에게 좀 다정해지고 싶었다. 아마 꼭 착한 딸은 아니라도, 믿을 수 있는 딸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막내딸이든 뭐든, 엄마가 가장 마음 놓을 수 있는 딸. 엄마가 이 딸은 그래도 믿을 수 있다, 라고 생각하는 딸. 걱정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살아줄 거라고 생각하게 되는 딸. 그런 딸이 되고 싶었다. 똑똑하니까, 알아서 잘 하겠지-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딸.
그래서 그런 딸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든 별로 엄마 속을 태우는 딸은 되지 않았다. 자라는 동안 가장 얌전하고 조용하며 탈 없는 학교 생활은 한 것만은 분명했다. 엄마를 별로 마음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엄마가, 내게까지 마음 쓰진 않아도 될 정도로는 살고 있는 것 같다.
04.
그런데, 그래서 난 행복할까? 엄마가 날 걱정하지 않는 정도로는 살고 있어서 행복한 걸까?
그걸 잘 모르겠다. 엄마를 기차역에 바래다주고 돌아오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05.
나 자신에게 만족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마, 엄마가 자랑스러워하는 딸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난 그렇게는 되지 않을 것이고 되지도 못할 것같다. 엄마는 바르고 곧은 사람 같은데, 난 엄마를 가장 닮은 딸인데도 불구하고 엄마의 그런 점은 전혀 닮지 못했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