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른다/2006.01 ~ 2006.12
2006년 4월 17일, 특별한 하루
dancingufo
2006. 4. 17. 04:44
01.
가벼운 봄옷을 입고 싶었지만, 오늘은 추우니까 감기 조심하라는 문자에 겨울옷을 걸치고 집을 나섰다. 골목길을 내려가는데 한 무리의 아이들이 종알거리는 귀여운 목소리로 "예수님이 부활하셨어요~" 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나는 잘 모르는데, 저 녀석들은 알고 있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팔랑팔랑 신이 난 듯 뛰면서 외치는 모습이 귀여워, 곁을 지나가는 한 녀석의 머리를 슬쩍 쓰다듬어 보았다. 왜 그러세요? 하는 눈빛. 답할 말이 없어서 나는 그냥 웃음. 너도 결혼할 때가 됐나보다, 애가 그리 이쁜 걸 보니- 라던 언니의 말이 떠올랐다. 하긴 어릴 땐 애라면 진저리가 났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애들이 예뻐진 거니까. 괜히 민망해져서 아이들의 무리로부터 빠르게 멀어졌다.
02.
이미 시간이 넉넉하지 않아, 대전의 경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마음이 급해졌다. 그래도 김은중의 경기인데. 처음부터 봐야겠단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다행히 버스는 기다린 지 오래지 않아 와주었지만, 마지막 벚꽃 놀이를 즐기려는 사람들의 행렬 때문이었을까. 버스는 쉬이 달리지 못하고 자꾸만 멈춰섰다. 어쩌나, 막히는 대로 기다려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결국 도중에 내려 지하철로 갈아탔다. 그렇게 경기장에 도착하니 2시 59분. 표를 사서 경기장에 들어서니 3시 5분.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가며 눈으로 김은중의 모습을 찾았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김은중은 그라운드 위를 달리고 있는 대신 벤치에 얌전하게 앉아있었다. 고만고만한,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 속에서, 김은중은 제일 어여쁜 뒷모습을 하고 앉아있었다. 그 모습을 발견하자 오랜만이란 생각이 들었다. 안녕, 은중아. 오랜만이야- 라는 생각.
03.
4월이니까, 추워봤자 얼마나 추울까- 라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 생각보다 바람이 쌀쌀한데 햇빛까지 내가 앉은 자리를 비켜가, 결국 경기 내내 추위에 떨어야 했다. 날도 추운데 저렇게 앉아만 있노라면 얼마나 지루할까, 라는 생각이 들 때쯤 김은중이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풀기 시작했다. 예전에, 김은중이, 나의 팀 선수일 때, 잘 다치지도 않는 김은중은 벤치를 지킬 일이 없어서 이렇게 몸을 푸는 모습은 볼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낯설고 어색하게 김은중을 지켜봤다. 파란- 옷에 둘러싸여 있노라니 그다지 크지도 않고 그다지 건강해뵈지도 않았다. 많이 튼튼해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가.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 우리 팀에 있을 땐 그렇게 커다랗게만 보이더니, 이제는 장신이란 말이 무색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금 아쉬웠다. 난 키가 큰 김은중을 좋아했으니까. 난 김은중의 큰 키를 좋아했으니까.
04.
골을 넣어주길 바랐는데, 넣지 못했다. 조금 허탈해져서 탁탁, 미련을 털어버릴 양 소리를 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또 욕심도 내지 않는 팬이라니 얼마나 무력해- 하는 생각. 경기장을 빠져나오며 내가 본 김은중의 모습을 되짚어보았다. 잘 하는 것도 분명한데 잘하지 않는 것도 분명한 듯 했다. 왜 더 훌륭해지지 않는 걸까, 라는 생각. 왜 더 훌륭할 수는 없는 걸까, 라는 생각. 사실 나는 김은중을 답답해하고 있었다. 늘 존경스레 쳐다보는 듯 해도, 사실은 이렇게 답답해하고 이렇게밖에는 안 되는 것에 대해 속상해하고 있는 것이었다.
05.
집으로 들어서는데 갑자기 노곤하고 나른하여 몸도 좀 떨리고 눈은 감기고, 침대 위로 올라갈 기운이 없어 그대로 바닥에 누워버렸다. 따뜻한 바닥에 몸이 닿자마자 졸음이 밀려와서 잠깐 눈을 감고 있는다는 것이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눈을 뜨니 불도 켜지 않고 잠들었던 것인지 방 안이 캄캄했다. 몇시나 된걸까, 핸드폰을 열어보니 9시가 가까워진 시간. 그렇게 한 시간을 잔 모양이었다. 그제야 몸을 일으켜, 잔뜩 쌓인 피곤을 좀 씻어내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휘적휘적 방을 치워놓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주말이 가는데, 또 영화 한 편 못봤고 글 한 자 안 읽었단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매번 주중에 일이 쌓일 때면, 주말엔 못본 영화를 보고 못끝낸 책을 좀 읽자고 생각하지만- 생각으로만 끝나버린 주말이 너무 여러번 지나갔다. 결국 또 내가 한심해졌다.
06.
내가 나를 싫어하지 않게끔,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고자했다. 그냥 착하거나 부지런하거나 그런 것 말고, 내 기준에서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고자했다. 나에게 중요한 사람들에겐 좀 더 친절해지는 것. 변명하거나 거짓말하지 않는 것. 꾸미거나 젠 체 하지 않는 것.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보는 것. 더 깊게 생각하고 더 열정적으로 움직이는 것. 그런 것들을 하고자 생각했다.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든 나를,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여 견딜 수 없어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07.
그렇게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하루가 갔다. 조용했고, 이상하게 내내 기분이 처져있던 하루가 갔다. 추위와 자기 비하에 시달렸지만, 그러는 사이 오히려 감기는 나아버린 하루가 갔다. 피곤했지만 조금만 자야겠단 생각이 들어서 신문이 마당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후에 침대에 누웠다. 스무 네시간이 지나자 평범하게도 그냥 과거가 되어버린 하루가, 특별한 체하며 그렇게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