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른다/2006.01 ~ 2006.12
2006년 6월 17일, 슬픈 축제
dancingufo
2006. 6. 18. 05:02
01.
TV를 보지 않으니까, 거실에 나갈 일이 없었는데 월드컵이 시작된 후 매일매일 거실에 앉아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다보니 우리 거실이 얼마나 지저분한지도 알게 되었고, TV뒤로 뿌옇게 쌓인 먼지도 눈에 보였다. 결국 하프타임 때마다 거실을 닦게 됐는데 그걸 매일 해도 매일 걸레가 지저분한 게 신기하다. 매일 매일 그렇게 검게 닦여 나오는 먼지를 보고 있자니, 정말로 사람 사는 일은 이렇게 더럽고 지저분한 걸까- 란 생각이 든다.
02.
어릴 때부터 이상하게 스포츠 경기를 보면 그렇게 눈물이 났다. 남들 슬프다는 영화 보고는 웃어대서 오히려 욕을 먹는데, 스포츠 경기를 보다보면 이상하게 자꾸 코끝이 매웠다. 한참 농구를 좋아할 때 정작 본인은 기아를 응원했으면서 연세대가 삼성을 만나 지는 걸 보고, 그래서 농구 대잔치 4강에 들지 못하는 걸 보고 한참 울었다. 아마 그 때 그 기분에 감정 이입이 되어서 그 다음 해부터 연세대 팬이 되었으리라. (그리고 농구팬을 더 이상 안 하게 될 때까지 삼성이란 팀을 싫어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으니까 그 때는 91년. 아마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예선 경기였을 것이다. 주장 완장을 차고 나왔던 서정원이 발등이 갈라졌다던가 하는 식으로 몸이 성치 않았는데도 대포알처럼 강한 골을 성공시킨 후 두 손을 번쩍 들고 좋아하는 걸 보고 또 눈물이 났다. 대체 저건 다 왜 이렇게 감동적인 거야, 엉엉엉. 그러면서 난 많은 스포츠들을 좋아했던 것 같다. 축구를 좋아하게 된 시작도 그것이었고, 지금도 난 아주 멋진 골이나 골을 넣고 마구 소리지르며 좋아하는 선수들을 보면 금세 눈물이 나곤 한다.
이 월드컵이, 나한테는 그냥 그런 의미든 뭐든. 선수들에게는 일생에서 가장 바라던 무엇일 수 있지 않겠냐 생각하는 것이다. 그 무대에서 골을 넣는다는 것은 대체 어떤 기분일까, 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부상이나 또는 패배. 마지막 월드컵 무대, 같은 것에 대해서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계속 슬퍼지고 만다.
음, 그래. 이제 알겠다. 월드컵은 참 슬픈 축제다.
03.
난 지단을 좋아한다. 물론 김은중이나 홍명보나 라울처럼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지단이 최고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그 선수가 끝까지 영광과 함께 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축구란 것은 지단의 마법도, 네드베드가 가진 두 개의 심장도 언젠가는 퇴색하고 만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지단은 세계 최고의 마법을 부릴 줄 아는 선수였지만, 나이가 들자 그 마법이 약해진다. 네드베드가 가진 두 개의 심장도, 자신의 팀과 자신의 팬에게 기적을 보여주진 못한다. 그것이 축구이다. 그리고 그 사실이 이 월드컵을 통해 전세계 사람들에게 알려진다.
그래서, 월드컵은 참 슬프다.
04.
시선이, 새로 떠오르는 쪽을 향해있지 않고 현재를 등지고 돌아서는 쪽을 향해 있으니까. 그러니까 난 계속 슬퍼하고 아쉬워하고 그럴 것이다. 지단이나 네드베드를 보다가, 나 너무 무서워졌다. 곧 몇년 후엔 라울이, 김은중이, 저렇게 등을 보이며 사라져갈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내가 과연 그 사실들을 다 차분히 받아들이고 계속해서 축구팬으로 지낼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05.
승리를 즐기며 기뻐하고 싶다. 그런데 매일매일,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면서 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