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윤석화의 Wit, 죽음이여 자만하지 말라 본문

피도 눈물도 없이

윤석화의 Wit, 죽음이여 자만하지 말라

dancingufo 2005. 5. 13. 06:46



비가 내린다. 지난 달에도 연극을 보러 대학로에 왔을 때 비가 내렸다. 손에는 바로 그 지난 달, 대학로에서 샀던 분홍색 우산을 들고 있다. 비 내리네, 많이 오나봐, 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여고생들을 뒤로 하고 우산을 편다. 우산은 크지 않지만, 친구와 내가 나란히 비를 피할 만큼의 크기는 된다. 오늘도 비가 내리네- 훌쩍이고 난 후 아무런 말이 없는 친구에게 괜스레 말을 걸어본다. 연극을 보기 전까지 나는 매우 우울했다. 연극을 보고 난 후, 다른 생각에 빠져버렸기 때문에 우울했던 기억을 잊어버린다.

나는 문학에 매혹된 후, 언어를 경외시하게 된 경험이 있다. 비비안 베어링과는 반대의 순서다. 하지만 어쨌든 언어에 매력을 느낀 후 영문학을 전공했다는 그녀는 문학에 매료되어 국문학을 전공한 나에게 비교적 쉬운 감정이입의 대상이다. 그래서 과도한 감정이입을 거부하는 듯한 이 연극의 특징 따위 무색하게, 나는 베어링의 심정이 되어 운다. 초라한 자신을 무서워하는 그녀의 마음 때문에 운다. 주문이라도 걸듯, 반복해서 "죽음도 나를 죽일 수 없다."고 말하는 그녀의 두려움 때문에 운다. 인간의 따뜻함만이 희망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지금은 인간의 따뜻함이 필요한 시간- 이라고 말하는 그녀 앞에서 당신이 틀렸다고 말할 수가 없다.

어두운 거리를 걸어 지하철 역으로 향하는데 울컥 다시 눈물이 난다. 그녀가 결국 죽었기 때문이 아니다. 의사들이 그녀를 하나의 실험체로만 생각한 탓도 아니다. 그저 나는 1시간 30분 동안 쉴 새 없이 얘기를 걸어오던 윤석화의 목소리에 대해서 생각한다. 훌륭한 예술가들을 보는 일이 갈수록 왜 이렇게 고통스러워지는지 모르겠다.

인간의 따뜻함이 필요한 시간. 내 따뜻한 말. 내 따뜻한 손짓. 그런 것을 필요로하는 인간에게 다정해지지 않는 나에 대해 생각한다. 과연 죽음 앞에서는 나 역시 이런 나에 대해서 반성하게 될까. 죽음은 왜 모든 자신을 반성하게 만들고, 모든 타인을 너그럽게 만드는 걸까.

죽음이여, 자만하지 말라던 존던의 시. 집으로 돌아와 서너번을 읊어본다. 시가 나에게 말을 걸어온 것은 무척이나 오랜만의 일이다.

죽음이여 자만하지 말라, 어떤 이들은 너를 힘 세고 무섭다 일컫지만, 넌 그렇지 않나니. 네 생각에 네가 해치운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죽는 게 아니다. 불쌍한 죽음아, 넌 나도 죽일 수 없다. 너의 그림에 지나지 않는 휴식과 잠에서 큰 기쁨 나오나니, 너로부터는 더 큰 기쁨 나온다. 또한 훌륭한 사람들 유골의 안식과 영혼의 해방 찾아 되도록 빨리 너와 함께 간다. 너는 운명, 우연, 제왕들, 그리고 절망한 자들의 노예. 그리고 독약과 전쟁과 질병과 함께 산다. 그뿐인가, 아편이나 마법도 너의 일격만큼 또는 더 잘 우릴 잠들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자만하느냐. 짧은 한잠 지나면, 우리는 영원히 깨어난다. 그러면 죽음은 더 이상 없을 것. 죽음이여, 네가 죽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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