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아무도 모른다/2005.05 ~ 2005.12 (180)
청춘
젖은 머리를 하고 방에 앉아있다. 환기나 시키자고 열어둔 창으로 찬 바람이 들어온다. 치마 대신 바지를 입고 두터운 티셔츠를 하나 더 껴입어도 한기는 가시지 않는다. 이 한기처럼 불안정한 마음도 늘 내 곁에 있을 것만 같아 쓸쓸해진다. 지금도 난 타인의 많은 일상들을 경멸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과의 대화는 늘 같은 거리를 유지하는 식이다. 아무리 모가 나고 뒤틀린 나라도 글 속엔 독을 품지 말자고 생각한다. 하지만 늘, 독이란 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소리도 들리지 않는 채로 스며든다. 읽고 다시 읽으며 점검을 해보지만 결국은 냄새가 날 것이다. 이 불안함은, 겨울 내 곁을 떠나지 않는 한기처럼 언제나 내 주위에 머물 것이다. 잃은 것만 아니라면 좋겠다. 이 허탈함이 그저 젊음의 대가라면 좋겠다. ..
01. 크리스마스였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란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축제일 것이다. 물론 내게도 크리스마스의 의미란 그렇다. 이 날은 그저 기분좋게 쉬는 날이다. 이번 해는 하필이면 일요일과 겹쳐서 그다지 기분이 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거나 이렇게 온통 축제 분위기를 내는 날이란 것은 나름대로 좋다. 그런 날 내가 그다지 축제 기분을 내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02. 이번 크리스마스는 계획했던 대로 책을 읽으며 보냈다. 나이가 들수록 책을 가까이하지 않게 되는 것은 사실이고, 그런 나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면서도 사무실에 오갈 때나 책을 펼쳐들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휴일이랍시고 집에 앉아 진득하니 책을 읽어본 지도 꽤 되었다. 하여 이번 크리스마스엔 별..
01. 일찌감치 문을 열고 나서면, 거리는 금세 내린 눈에 쌓여 은은한 빛을 내고 있다. 구두굽에 눌러붙은 눈덩어리가 녹아내리며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몇번이나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골목길에는 늘 사람이 적다고 생각했건만, 씬이 바뀌자 등장하는 엑스트라 군단처럼 갑자기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모여든다. 이것이 바로 아침의 풍경인가. 신기하고 괴이하여 나는 그 풍경을 가만히 보고 있다. 아마도 공기는 갓 냉동실에서 꺼낸 아이스크림의 맛일 것이다. 차갑지만, 신선한 공기다. 나는 조급하지 않게 그 공기를 들이마셨다 내뱉으면서 느리게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일찍 시작되는 하루다. 어울리지 않게 부지런으로 시작되는 하루다. 02. 길을 잘못 들어, 뱅뱅뱅 영화관 입구를 찾아 돌다가 쌓인 눈을 어찌나 밟아댔던지 발..
알았어. 안 그럴게. 억지 부리지 않을게. 떼쓰지 않을게. 심술궂게 굴지 않을게. 안 되는 걸 되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을게.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정말로 잘할 수 있어. 그러니까 이제는 그러지 않도록 할게. 이게 다 신기루였다는 걸,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늦잠을 잤다. 그리고 지각을 했다. 요즘은 늘 이렇게 무엇엔가 늦어버린 기분이 들곤 했다. 아니라면, 결국 도착했을 땐 이미 늦어버렸을 것 같은 기분이 말이다. 그것이 꼭,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진심을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허탈해하고 인간이 그러면 그렇지, 라고 밖에 생각못하는 나를 미워한다. 이렇게 나를 미워하는 동안에는 이 자리가 한계일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인 것이다. 난 그 기분이 무엇인지 정말로 알 것 같다.
01. 예를 들면 이딴 걸 고민하는 것이다. 한숨, 쉽지 않구나. 한숨, 관둘까. 한숨, 대체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그렇지만 사실, 고민에 대한 답도 없을 뿐더러 아무것도 한 게 없는 나로서는 고민할 자격도 없는 것이다. 02. 물론 고민 따위 하지 않는다 치더라도 조금,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03. 오랜만에 '장화 홍련'의 OST를 들어본 결과, 역시 마음이 아프다. 찌찍- 하고 심장의 주파수를 건드리는 것이 분명한 음악. 04. 그나저나 그딴 식으로 끝나다니, 뭔가 또 다시 속은 기분이 든다.
01. 퇴근할 즈음, 갑자기 못견디게 짜증이 났다. 사람들로부터 난 소외당하고 싶어졌다. 고개를 푹 숙이고 책상에 얼굴을 파묻었다. 너무나 짜증이 나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소리라도 지를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난 내 짜증을 못 이겨 타인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최악의 인간이 된다면 정말로 화가 날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짜증을 꾹 참느라 결국 베어나온 눈물을 훌쩍훌쩍 닦으며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난 내가 좀 더 낭만적인 일에 나의 에너지를 쏟을 수 있길 바랬다. 그렇지만 친구는 낭만은 어제 내린 눈 같은 거라고 답을 했다. 그에 비해 현실은 나를 득달하는 빚쟁이같은 거라고 말이다. 어쩐지 조금 납득이 갔다. 평생 빚 독촉에 시달리는 것이 삶의 본질이라는 것. 그렇지만 그런 납..
누구나 사랑을 한다. 나도 사랑을 했다. 그 사랑이 끝났을 땐 슬펐다. 그럼에도 다시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특정한 누군가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언제나 다시 사랑하고자 하는 욕구가 내 안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했던 일 역시 그 욕구에 의해서 태어났다. 그 날은 아무런 예감이나 징조도 없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날이었다. 난 나같은 사람마저, 타인을 좋아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을 그렇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렇지만 그 마음을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죽었던 고통도 함께 생겨났음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겠는가. 난 그를 알고 지내는 동안 언젠가 내가 그를 잃고 말리라는 생각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가 만약 내 곁으로 바짝 다가와 선다면 큰 소리로 울음..
모든 헤어짐은 이렇게 갑작스럽고 잔인하며 그 상대가 남긴 추억에 걸맞지 않게 그저 사소하기만 한 것인지. 감상주의에 빠지고 싶진 않아. 그렇지만 확실히, 화가 나고 속상해.
01. 선택, 해야해.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해야해. 안 하면 더 어려워질 테니까. 02. 왜 안 돼? 라고 생각하자. 그냥 이대로는 왜 안 돼? 안일한 생각인 것은 나도 알아. 용기가 없어서라고 해도 좋아. 일단 겁이 많은 탓이라고 해두지 뭐. 그러면, 그러면 왜 안 되는데? 안일하면 좀 어때. 용기가 없는 게 죄는 아니야. 겁 좀 낸다고 세상 못 살아? 그러니까 그냥 이대로 있으면 안 돼? 난 그냥 여기서, 이 자리에서, 이렇게 계속 농담이나 하면서, 농담을 해주면 웃기나 하면서, 그렇게는 안 돼? 안 돼? 정말로, 안 돼. 03. 아는데, 아는 것만큼 행동하기 힘들어서 그러는 거야. 나 좀 봐줘. 당분간만 좀 봐줘. 04. 추위에 귀가, 무릎이, 떨어져 나가지 않게 모자와 바지를 준비할 거야. ..
좋은 사람을 만난 친구의 얼굴에서는 평소보다 18%쯤 더 많은 생기가 느껴졌다. 좋은 사람이 생기는 것만으로 삶의 사소한 부분들이 얼마나 많이 달라지던가, 생각을 하며 그런 좋은 사람을 만나기까지 한 내 친구의 사소한 일상들은 분명히 예전보다 덜 외로울 거라 짐작을 했다. 누구에게든 친구가 채워줄 수 없는 부분이란 것이 있어, 나로서는 도저히 충족될 수 없었던 것들을 이제부턴 그 남자가 도와줄 거라 생각하니 어쩐지 조금 든든하고 어쩐지 조금 고마워졌다. 자주 만나고 오래 같이 있는 일보다 힘이 되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나의 편이라는 믿음이다. 그런 믿음을 올 크리스마스의 선물처럼 네가 받아낸다면 그 선물을 준 그 사람은 분명히 좋은 사람일 것이다.
잠꼬대를 하다가 잠에서 깼다. 나는 "싫어"라고 소리를 치고 있었다. 잠에서 깨면서 내가 무엇을 향해 싫다고 소리쳤는지 궁금해졌다. 그렇지만 끝끝내 생각이 나지 않았고, 다시 잠을 이루는 것조차 잘 되지 않았다. 냉정해지고 싶지만, 지금은 너무 춥다. 즐거운 일이 일어나길 바라고 있지만, 나는 아마 그 눈동자를 계속해서 생각함으로써 쉬이 잠드는 평화마저 빼앗길 것이다. 이런 걸 두고 악순환이라고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01. 날이 추워서, 감기가 걸려서, 목이 아프고, 콧물이 나고, 목소리가 가라앉은 것까진 이해하겠는데 대체 왜 이렇게 계속해서 눈이 피곤한 걸까. 목감기 코감기도 모자라 눈감기까지 생겨나는 것일까. 02. 이건 참 극복할 수 없는 성질 중 하나인데, 한번 사람이 싫기 시작하면 그 사람과 말 한 마디 섞는 것조차 싫으니. 싫다. 싫다. 나 당신 진짜 싫어. 03. 좋아하는 마음도 싫어하는 마음처럼 이렇게 한결같으면 좋을 것을. 나는 두려워하고 있다. 흔하디 흔한 인간처럼 내가 너도 혐오하고 경멸하며 비웃게되는 날이 올까봐. 04. 춥다. 겨울이구나. 따뜻하고 귀여운 장갑을 사야지.
현실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지도록 나를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끊임없는 결핍과 괴로움만이 나를 나로서 살아가게 할 것이다. 안정도, 부유함도 나를 행복하게 만들 수 없음을 잊지 않으면 된다. 사랑이나 충만한 관계의 기쁨도 마찬가지다.
잘 모르겠지만, 첫 눈이라고 생각했다. 올 해 들어 내가 본, 첫 눈이기 때문이다. 한 송이, 두 송이 떨어지던 것이 함박눈으로 바뀐 것은 순식간이었다. 나는 택시를 잡아타며 세상 밖을 쳐다보았다. 어쩐지 조금 가슴이 두근거렸다. 문득, 겨울은 참 축제와 잘 어울리는 계절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일년 중 겨울이란 계절은 그 자체로 축제인 건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이 모여있다는 곳으로 찾아가는 중에 내 구두 위로, 내 어깨 위로, 내 눈썹 위로 흰 눈이 내렸다. 나는 깜빡, 눈을 감았다 떴지만 속눈썹에 내려앉은 하얀 눈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마감 이틀전이며 첫 눈이 내린, 기막힌 조화를 이룬 토요일 저녁은 13년 전부터 인연이 닿아있던 녀석의 생일이었다. 나는 약속 시간에 늦은 ..
01. 놀 때는 계속계속 놀고 싶지만, 놀고 나면 계속계속 놀기만 했던 것이 너무 후회돼. 아악, 내가 이렇게 한심해빠진 태도로 살고 있다니. 후회없이 놀거나, 일 한 후에 후회하지 말거나 둘 중 하나를 하자고! 02. 오늘은 정말 일기를 쓰면 할 말이 있었건만, 졸리는구나. 03. 음, 생각해보면 그래도 난 글을 대함에 있어서는 나름대로 충성도 높은 연인. 졸릴 땐 함부로 글을 쓰는 게 아냐. 잠이나 자는 게 맞아. 04. 쿨쿨쿨, 늦잠자지 말아야지.
이쯤에선, 좋은 일이 한 가지쯤 일어날 법도 하건만. 그나저나, 12월인가.
젊어서, 어렸던 나를 보면서 웃듯 늙어서, 젊었던 나를 보며 웃겠지. 시간이 속수무책으로 흘러버리는 것이 슬플 때도 있지만, 지나가버린 시간에 내가 분명히 살아있었다는 사실이 결국 나를 위로하게 될 거야. 그러니까 두려울 것도 없어. 내 착각과는 달리, 난 그다지 무모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이것들이 그다지 두렵지 않은 존재라는 것 정도는 알아. 현실도 말이야. 시간도 말이야. 그렇게 벌벌 떨 것 없다는 걸 알고 있어. 난 가끔 어떤 인간의 어리석음을 무자비하게 비웃고, 또 가끔 어떤 인간의 열정을 맹목적이게 찬양하지. 전자는 나의 교만과 편견을, 후자는 나의 무지와 좁은 식견을 나타내는 일이므로 어느 쪽도 옳지는 않지만 놀라운 것은 어느 한 대상이 그 두 가지 모두를 내게서 받을 때가 있다는 사실이야. ..
축구를 삶과 동일시하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이럴 땐 너무너무 우울하고 억울해서 인생을 통채로 부정하고 싶다. 역시 하나님은 나 같은 어린 백성의 믿음 따위 필요없는 것인지, 이번에도 나를 저버리셨다. 세상에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0.18%쯤 믿었던 정의 역시, 그딴 게 있을 리 있냐고 음하하핫 웃으며 나를 내동댕이쳤다. 나는 어떡해야 한담. 흑흑흑 우는 수밖에 없나. 그치만 운다고 뭐가 달라질까. GS, 하던 일이나 계속 했으면 오늘 할 일은 대충 끝냈을 텐데. 그래. 대전에서 얻지 못한 승리 때문에, 그 승리의 부재를 괜찮은 척 하면서, 정작 그 허전함을 이쪽에서 달래려고 했던 건지도 모른다. 난 가끔 유난스레 승리에 집착하는 축구팬들을 보면 이기는 게 좋긴 하지만 그게 전부이거나 가장 중요한 ..
01. 망년회 운운하는 걸 보고 무슨 벌써부터 망년회를 연단 말인가, 생각을 하다가 2005년이 고작 한 달 남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루. 일주일. 열흘은 늦게 가는데 한달부터는 시간이 무서운 속도로 지나가 버려서 그 이후의 시간은어느덧, 갑자기, 어느 새, 가 되어버린다. 늘 그랬다. 이번에도 그렇다. 02. 감정에 솔직하자는 게, 있는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자는 게, 이 감정을 가지고 있는 만큼 표현하자는 게, 사실 말만 들어도 어려우니까. 그대로 하는 게 쉬울 리 없다. 그런데도 하자고 마음을 먹었으니. 장하다. 장하다. 장한 거다 확실히. 03. 내 피부상태는 늘 양호하다고 자신만만하게 단언해버린 탓일까. 입술 밑으로 뽀드락지가 두어개 더 나더니 며칠째 꽤 아프다. 보기도 흉한 것이 아프기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