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무라카미 류, 지상에서의 마지막 가족 본문

피도 눈물도 없이

무라카미 류, 지상에서의 마지막 가족

dancingufo 2005. 5. 19. 02:59

히키고모리(ひきこもり). 어쩐지 그 발음만으로도 쓸쓸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편견이나 선입관일 것이다. 이 책을 펼치기 전까지 나는 이런 단어를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까 [지상에서의 마지막 가족]의 ‘히데키’가 히키고모리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이다. 나는 히데키를 통해서 히키고모리를 만난다. 그리고 히데키는 내게, 쓸쓸하고 서글픈 이미지의 히키고모리를 남긴다.

류는 시원하고 매끄럽게 이야기를 끌어가지만, 나는 몇번이나 책을 덮었다 펴고 다시 덮었다 펴기를 반복한다. 이 소설은 어쩐지 고통스럽다. 방 안에 틀어박힌 히데키가 창문에 바른 검은 종이로부터 직경 십 센티미터의 둥근 구멍을 내고 있다. 히데키는 방에만 틀어박혀 지낸 지 일년 반이 지났고, 외출해서 타인과 접촉하는 것뿐만 아니라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것조차 견딜 수 없어서 창문에 검은 종이를 바른 히키고모리이다. 물론 이 직경 십센티미터의 구멍은 결국 히데키에게 세상으로 나올 수 있는 ‘희망’의 시작이 된다. 그렇지만 나는 그때 그런 결말 따위 알고 있지 못했고, 히데키가 앓고 있다는 그 병에 잔인함에 대해서만 생각해야 했다. 삶이, 세상이, 인간에게 끝없이 잔인하고 냉혹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관계맺음’이 없다면 생존조차 불가능한 인간에게 그런 병까지 들게 하다니……. 삶은, 세상은, 인간에게 끝없이 잔인하고 냉혹해진다.

히데키의 가족인 우치야마가에는 네 명의 가족이 살고 있다. 어머니 아키코. 아버지 히데요시. 딸 도모미. 그리고 아들 히데키. 식사만은 가족이 모두 함께 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원칙 아래 그들은 함께 식사를 한다. 그렇지만 삶은 예측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로 이루어지고, 구성원들은 반드시 사회의 규칙을 어기고야 만다. 함께 식사를 해야 한다는 히데요시의 규칙에서 가장 먼저 벗어나는 것은 도모미다. 그리고 방 안에 틀어박힌 히데키가 식탁에서 벗어나고, 그렇게 식사는 가족의 것이 아니라 개인의 것이 되어간다. 어차피 식사를 같이 한다고 해서 가족이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보호될 거라는 생각은 순진한 믿음이거나, 오만한 착각일 뿐이다.

가족은 붕괴된다. 함께 있다는 것이 최선은 아니다. 아버지는 회사에서 벗어나 고향으로 가고, 어머니는 집에서 벗어나 자신의 일을 찾고, 딸은 행복하지 못한 저녁 식사로부터 벗어나 파리로 떠나며, 아들은 제 방 안에서 벗어나 공부를 한다. 사실은 이렇게 흩어지는 것이야말로 최선인지도 모른다. 함께 있다고 해서 누가 누군가를, 가족이 또 다른 가족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류는 바로 이 얘기를 하려고 한다. 서로가 가족이라는 이유로 누가 누군가를 구원하고 또 누군가에 구원받는 일이 허위라는 것을.

결국 가족은 각자의 길을 따라 흩어져 버리지만 나는 이 소설을 Happy ending으로 읽었다. 혼자서 일어서지 못한다면 삶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 누군가를 탓하고 원망하며 구원을 기다리는 대신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는 걸 깨달은 히데키는 방에서 나온다. 그리고 나는 히데키가 방을 빠져 나오고 대학을 가고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 겨우 이 책을 읽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된다.

“폭력을 휘두를 때의 오빠 얼굴은 절대로 제 얼굴이 아니다. 흉폭한 표정이 아니라, 너무 창피해서 당장 죽고 싶어 하는 듯한,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다. 그런 오빠를 보는 것은 공포 그 자체이다. 나 자신도 그런 표정을 지을 때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면 숨이 턱 막힌다.”라고 도모미가 말할 때, 나는 마음이 아프다. 나를 내가 제어할 수 없을 때, 인간은 얼마나 비참해질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한다. 히데키가 안쓰럽고 불쌍하고 슬프고 서글픈 것은, 내가 그와 조금도 닮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어리광을 부리고 있다. 단지 멀쩡한 것처럼 굴고 있을 뿐이다.

류는 아무렇지 않은 듯한 어투로 내게 고통을 들이댄다. 나는 그런 류의 말투 때문에 힘이 들다. 그렇지만 류는 결국 내게, 어떤 식으로든 다시 걸어 나가는 사람들에 대해 말해줬고 그리고 나는 나를 돌아본다. 혼자 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도 타인에게 기대고 타인을 기대하며 자꾸만 어리광을 부리면 히키고모리처럼 방 안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그러니까 나도 이제 일어서야 한다고. 그러므로 나도 이제, 밖으로 나가 삶을 정면으로 마주한 히데키처럼 용기를 내야 한다고. 이 지상에는 더 이상은 나를 구원해 줄 가족 같은 것은 남아있지 않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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