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2005년 5월 23일, 돌아오는 길 본문

아무도 모른다/2005.05 ~ 2005.12

2005년 5월 23일, 돌아오는 길

dancingufo 2005. 5. 23. 05:13

버스에서 내리자 비가 내리고 있다. 덕분에 공기가 한껏 차가운 채이다. 기습적으로 내 맨팔에 와닿는 것은 한기. 팔에서 오도독 소름이 돋는다. 추워서 걸음을 빨리 해보지만, 곧 앞을 가로막는 것은 붉은 불의 신호등이다. 역시 세상은, 내가 가고 싶다고 해서 무조건 걸어가도 되는 곳이 아니다. 나는 가끔, 이 세상과 타협해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면서 들고 있던 우산을 뱅뱅 돌린다. 예쁜 분홍색 레이스가 머리 위로 촤라락 움직이고 있다. 나는 기분이 좋다. 즐겁다. 행복하다. 내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의 노력에 의해서 행복해지는 일은 절반의 허전함을 안겨준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 기분이 좋다. 즐겁다. 행복하다. 이것은 축구가 내게 주는 기쁨. 고통을 참는 대신 누리는 행복. 이 행복은 순수해서 좋다. 나는 아직도 순수하게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이런 동안만이라도, 자의식이란 것이 잠시 숨거나 죽거나 그랬으면 좋겠다. 쓸모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 죄책감이 되어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달라지지 않으려 하면서 끊임없이 현실을 비난하는 것은 옴쌀달싹 못하는 괴로움이 된다. 나는 어차피 침묵하지 못하니까, 쓸모없는 대화를 괴로워하지도 말아야 한다.

두 팔과, 두 다리를 늘어뜨리고 앉아 무심코 떠오르는 너에 대해 생각한다. 너는 나를 알아보아야 한다. 내가 너를 알아본 것처럼. 나는 성심성의껏 잘해나갈 자신은 없지만, 니가 나에게 무관심한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니까 너는 나를 알아보아야 한다. 내가 너를 알아본 것처럼.

인생에 방해가 되는 것은, 예술적 능력으로 부와 명성을 얻을 수 없다는 것. 아마 난 잊지 못할 것이다. 눈부셨던 내 자신감이, 어떻게 초라하고 모가 난 자기 방어로 변해갔는지.

내가 축구를 좋아하는 것은, 그렇게 미쳐있는 동안에는 나 자신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대전의 승리나 김은중의 골, 이런 것들에서마저 위로 받지 못하면 견딜 자신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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