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2005년 5월 25일, H 본문

아무도 모른다/2005.05 ~ 2005.12

2005년 5월 25일, H

dancingufo 2005. 5. 25. 05:11

함께 사는 동안, 가장 맛없는 음식을 만들었던 건 H였다. H는 우리들 사이에서 게으르기로 유명했다. 때문에 청소나 설거지, 빨래 같은 것들에 무감했고 나는 종종 그런 H에게 잔소리를 퍼부어야 했다. 발을 씻지 않고 침대에 올라가지 말라거나 양말과 수건을 같이 세탁기에 돌리지 말라거나 속옷은 제때 제때 빨아 입으라거나.

친구에게 그런 말을 듣는 것이 싫을 법도 했건만, H는 한번도 내게 화를 내거나 기분 나빠한 적이 없었다. 늘 인상을 쓰고 소리를 지르는 것은 나. 그리고 H는 그런 내게 언제나 웃으면서 말했다. 귀찮아. 하기 싫어. 쉬고 싶어.

중국에서 잠깐 귀국해 들어왔을 때, H는 내년에 결혼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 때 우리 나이 고작 스물 여섯이었다. 만나는 남자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난 스물 여섯이면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열 아홉 살 이후 남자 없이 한번도 지내보지 않은 아이가 H 아닌가. 나는 H가 남자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고 생각했다. 그런 H가, 혼자 지내는 것이 힘들다는 이유로 덥썩 결혼해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고 조금 걱정이 됐다.

석달 전, H가 그 남자와 함께 살기 시작했을 때 나와 M은 딸기를 사들고 H의 집을 찾아갔다. 방 한 칸에 주방 하나. 나는 들어서면서 H가 좀 더 부유한 남자와 결혼했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을 했다. 집은 생각보다 깨끗했고 H의 남자는 무척이나 사람 좋아 보였지만, 어릴 때부터 남다르게 고생을 하고 자란 H에겐 좀 더 부유한 남자가 좋을 거라 생각을 했다.

석달이 지나는 동안 나는 한번도 H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 사이 H는 두어번의 전화를 걸어왔고, 열통쯤의 문자를 보내왔다. H는 나에게 백숙을 끓여주겠다 했다. H가, 다른 사람도 아닌 게으르고 음식 못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던 H가, 나에게 저녁을 차려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석달만에 만난 H는 조금 더 여위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작고 말라서 아동복이나 입으면 어울릴 것 같은 H가, 고개를 숙이면 등뼈가 훤히 드러날 만큼 여윈 것이 눈에 띄었다. 손을 잡고 시장을 찾아 들어가면서 H는 사는 게 힘들다고 말했다. 사는 게 힘들어. 오빠는 내년에 결혼식 올리자고 하는데, 나는 자신이 없어. 지금도 이렇게 힘든데, 정식으로 애낳고 그러면... 정말 힘들 것 같아.

H에게, 살아보고 결혼하라고 설득을 시킨 것은 E였다. 스물 한살에 다 같이 모여살았던 우리가 제각각 흩어지는 동안에도, E는 마지막까지 H의 동거인으로 남아있었다. 그리고 몇년간 함께 살던 친구를 다른 집으로 보내면서 E가 해준 마지막 충고는 그것이었다. 살아보고 결혼해. 급하지 않으니까, 살아보고 결혼해.

나는 이것저것 질문을 던지고, 이것저것 H의 질문에 대답을 하며, 가스렌지 앞에 서서 백숙을 끓여내는 H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나보다 5cm쯤 더 작은 H는 아직도 너무 어려보였다. 그런 H가 나를 앉혀놓고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져서 핸드폰을 꺼내 H를 찍었다. 우리가 함께 살게 된 것은 나와 중학교 때부터 친했던 E가, 역시 중학교 때부터 H와도 친했기 때문이었다. 나란히 김해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다시 만난 M, E, J, H 중 나와 가장 늦게 알게 된 것은 H였다. 그런데도 나는 특별히 H에게만 다정하게 굴고 싶어했다. H가 동생처럼 작고 안쓰러웠던 이유였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까 그때 니가 왜 S를 좋아했는지 모르겠어. S는 니 타입이 아니잖아.]

저녁을 먹던 H가 문득 내게 물어왔다. H가 꺼낸 이름은 나도, E도, M도, J도 기억할 게 분명한 이름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그 얼굴을 떠올리려 했지만, 어쩐지 S가 어떻게 생겼는지 조금도 기억나지 않았다.

[S는 좋은 사람이었어. 그래서 좋아한 거야.]

달리 할 말이 없었기에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렇게 대답하고 보니, 그것이 정말 사실처럼 느껴졌다. TV에서는 어린 소녀가장이 자기보다 더 어린 남동생에게 구구단을 외우게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소녀 가장의 예쁘장한 얼굴을 바라보며 H가, 과거부터 쭉 내 곁에 존재해온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실감을 했다.

생각해보면 친구들은 참 자주, 밥을 하고 요리를 해 내가 끼니를 챙길 수 있도록 해주었다. 나는 많은 친구들의 손에서 만들어진 아침을, 점심을, 저녁을 먹었고 그것들을 한번도 갚아주지 않았다. 그 속에는 H도 들어가 있었다. 나는 H가 동생 같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H는 나보다 훨씬 더 빨리 어른이 되어있었다.

나는 비스듬히 누워있는 H의 곁에 누워, H의 팔짱을 꼈다. 집들이 기념이라며 나와 M이 사준 쿠션 위였다. 언젠가 늘 H가 내 곁에서 잠들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H의 곁에 누워 있자니 우리가 시간 속을 함께 떠내려 오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끔 손을 놓기도 하고 가끔 먼길을 돌아 따로따로 오기도 했지만 다시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같은 물길 속에 있었다. 나는 내가, 끊임없이 나쁘게 굴어도 완전하게 혼자가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어쩐지 기뻤다. 나란히 누워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나는 이 평화가 우리의 삶에서 영영 사라져 버리는 일 따위 일어나지 않길 바랬다. 가끔 H의 곁에 누워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만 있다면, 어쩐지 삶의 잔혹함도 조금은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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