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2005년 5월 26일, 오랜만이에요 본문

아무도 모른다/2005.05 ~ 2005.12

2005년 5월 26일, 오랜만이에요

dancingufo 2005. 5. 26. 18:09

잔디 위의 너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이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년 전, 니가 달고 뛰었던 그 번호는 내가 좋아하지도 않았고 너에게 어울리지도 않았던 22번. 다가가며 보아도 너는 지금 22번을 달고 있다. 웬일인 걸까, 니가 맞는 걸까, 고개를 갸웃하면 바람이 불어 휙- 하고 날리는 곱슬곱슬한 머리카락. 그 머리카락은 아직도 눈에 익다. 팔을 곧게 뻗고 돌아서서 걷는 걸음걸이도 그렇다. 니가 맞구나, 확인을 하면 입가로 슬쩍 웃음이 번진다. 오랜만이다. 너를 만나러 온 것은 참 오랜만.

적당히 붙은 근육 때문에 너는 이제 예전처럼 커보이지 않는다. 많이 변했죠? 많이 좋아졌죠? 나보다 더 오랜만에 너를 보는 지인은, 예전같은 호리호리함을 찾아볼 수 없는 너 때문에 놀라고만다. 5월의 햇볕은 따뜻하고 오후의 바람은 부드럽다. 타박타박 길을 걸어, 운동장 우측에 놓인 벤치 위로 가 앉는다. 공을 쫓아 달려온 니가 내 앞에서 멈춘다. 오랜만이다. 너를 이렇게 마주치는 것은 참 오랜만.

어떤 순간보다도, 잔디 위에서 달리는 그 순간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그 사실을 깨달으면서 나는 점점 욕심을 잊었다. 우리 선수였으면 좋겠어- 그 욕심은 절절 내 가슴을 끓게도 만들었다. 니 이름을 연호하는 무리가 우리가 아니라는 사실에 얼마나 화가 나고 서러웠는지, 설명을 해도 너는 모를 것이다. 포기하고 다시 욕심을 내고 또 다시 포기하고 다시 욕심을 내는 일을 얼마나 수없이 반복해야 했는지, 말을 해도 너는 모를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너는 달리고 있고 나는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괜찮아진다. 괜찮아져버린다. 내 마음은, 너를 우리 선수로 소유하려는 욕심보다 니가 그저 잘해주었으면 하는 희망에 먼저 점령당한다. 너는 달리고, 나는 그런 너를 바라보고 있다. 너는 다가오고, 나는 그런 너에게 웃는다. 너는 웃고, 나는 그런 너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것만으로도 괜찮아진다. 괜찮아져버린다, 언제나 내 마음은.

너는 우리를 떠나서 기록이란 걸 달성하기 시작했다. 고작 스물 일곱일 뿐이지만, 이미 출장 경기수가 200경기를 넘어섰고 이미 지난 해에 통산 50골을 달성했고 이제는 20-20 클럽에 이름을 올렸다. 그 기억의 8할은 우리와 함께 한 것. 그리고 너는 우리를 떠나면서 더 자라기 시작했다. 너무나 바랬던 것. 멈춰서지 않기를. 너무나 원했던 것. 한 자리에 서있지 않기를. 내 욕심은 늘 끝이 없었다. 팀의 승리보다도 더 강하게, 너의 영광을 원했던 내 욕심은.

그러니까 나는, 웃으면서 아직도 너를 보고. 태연하게 너에게 말을 걸고. 아무렇지 않게 다음 경기에 대한 얘기를 꺼낸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보이는 너는,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탁탁 털며 이런저런 무리들을 그냥 지나쳐 내 앞으로 와선다. 다음 경기 오겠구나- 대전이니까, 웃으며 말을 하는 니 얼굴 위에 깃든 것은 평화.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다. 이렇게 내가 그런 것처럼, 다행히 너도 나에게. 그리고 문득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니가 어느 팀의 승리를 위해 달리는가를 따지지 않든 너 역시, 내가 어느 팀의 승리를 응원하는가를 따지지 않아준다면- 그래서 그냥 이렇게 서로 아무렇지 않게 웃을 수 있다면- 그냥 그것으로도 됐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니가 너인 것으로 만족하고, 너는 내가 나인 것으로 편해진다면.

돌아오는 길에 기분이 좋아진다. 아니라고 말을 해도 나는 니가- 우리가 너를 좋아했던 시간을, 니가 우리의 영웅이었던 시간을, 기억하고 인정하며 특별히 보살펴주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편해진다. 너 때문에 속이 상했던 것은, 너 때문에 화가 나고 서러웠던 것은, 너 때문에 울고 싶고 답답했던 것은, 결국 너 때문에 치료되고 너 때문에 위로 받고 너 때문에 괜찮은 상태로 돌아온다. 너를 좋아해서 참 다행이다. 너를 그냥 지나치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 그 때 그렇게 너를 알아보고 쉽게 너에게서 돌아서지 않아서, 참으로 다행이다. 강하고 올곧고 성실한 너는, 언제까지나 나의 믿음으로 남겠지. 다름 아닌 내가, 다름 아닌 너를 좋아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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