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2005년 7월 13일, 소나기 본문

아무도 모른다/2005.05 ~ 2005.12

2005년 7월 13일, 소나기

dancingufo 2005. 7. 14. 03:39

며칠전부터 밀려있던 일을 숨 한번 크게 쉴 틈도 없이 후다닥 해치워버리고, 출근 이후 처음으로 휴식 시간을 가지던 참이었다. 하루의 첫 식사를 할 시간이었지만 지치고 답답하고 짜증이 나서 식욕이 없어졌고, 결국 두어숟갈 뜨다만 밥공기를 덮어둔 채 커피를 마시려던 참이었다. '세상에, 다 젖었잖아.' 놀란 듯 외치는 목소리는 먼저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려던 Y의 것이었다. 무슨 일일까- 생각을 하는 순간, 좌락좌락거리며 내리는 빗소리가 들렸고, 그러고보니 주완이 올 시간이 됐구나- 생각을 하는데 흠뻑 비에 젖어서 문을 열고 들어서는 주완이가 보였다.

까만 머리카락에서, 동그란 얼굴에서, 조그만 귓볼에서, 얇게 입은 티셔츠에서, 뚝뚝- 그치지도 않고 물방울이 떨어졌다. 나는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랍을 뒤져 급하게 수건을 찾으면 나는 내가 당황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게 뭐야. 이 비를 맞고 온 거야? 야단이라도 치듯 물으면, 고스란히 물 속에 뛰어들었다가 나온 꼴을 하고도 주완이는 씨익 웃음으로 답을 했다. 그 모습에 기가 차서, 이 꼴을 하고도 웃음이 나와? 찰싹 비에 젖은 등을 소리가 나게 때려주면 이 녀석도 참 못당할 녀석이란 생각이 들었다. 웃음이 많은 녀석이었다. 소리가 없고, 표정이 크지 않아서 깨닫지 못했던 것 뿐. 주완이는 언제 어떤 일 앞에서도 씨익 웃음을 짓고는 했다. 화를 내거나 불만을 터트리거나 신경질을 낸 적은 나를 만난 이후로 한번도 없었다.

쓱쓱 머리카락을 닦아주고, 얼굴을 닦아주고, 목덜미를 닦아주고, 손으로 잡고 비틀면 지익 그대로 물이 흘러내리는 옷을 닦아주는 동안 주완이는 가만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내가 주완이를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런 고요함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동생에 비하자면 이쁜 데도 없고, 귀여운 데도 없고, 아이다운 면도 가지지 못했지만 주완이는 가만히 곁에 앉혀두면 마음이 잔잔해질 것 같은 고요함을 가지고 있었다. 뚝뚝-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물. 그 물방울들을 빠르게 닦아내노라면 내 손짓에 가만히 저를 맡기고 선 녀석.

아무래도 감기가 들지 싶어 틀어놓았던 에어컨을 끄고, 따뜻한 녹차를 한 잔 끓여 앞에다 놓아 주었다. 그렇지만 주완이는 입고 있던 옷이 미처 다 마르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을 열고 나서려면, 거짓말처럼 비가 그쳐버린 사실이 억울한지 울상 섞인 웃음을 지으며 꾸벅 인사를 해보였다. 그리고 잠깐 소나기에 묻혔다가 제 색깔을 찾기 시작한 거리로 뛰어나가는 녀석을 보면서, 나는 내가 이 녀석을 이뻐하고 있다는 걸 갑자기 깨달았다. 그것은 새삼스러운 사실이지만 참 의외의 사실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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