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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 정체성 본문

피도 눈물도 없이

밀란 쿤데라, 정체성

dancingufo 2005. 7. 29. 01:38

01.

남자는 해변가에서, 낯선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와 혼동한다.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여자를 다른 여자와 구별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남자는 경악한다. 이런 남자를 두고 밀란 쿤데라는 우리에게 질문한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는 얼마나 큽니까. 만약 그 차이가 크다면 어떻게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존재의 실루엣을 알아보지 못하는 순간이 당신에게 있을 수 있습니까. 라고.

그렇지만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무 많은 존재가 그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든 것이 그를 중심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그도, 그가 아닌 타인도 그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어느 쪽이 이유가 되든 각각의 인간이 지니고 있는 정체성이란 것이 그다지 독특하거나 특별날 것 없다는 데는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랑하는 그가(또는 그녀가) 나에게 유일무이한 존재가 된다면 그것은 온전하게 내가 그를(또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사랑'이 된다.

오해 때문에 이별을 생각하고, 그 생각 앞에서 괴로워하던 여자는 막다른 골목에 섰을 때 사랑하는 남자를 생각한다. 그 남자가 있다면 내 이름을 불러줄 것이다, 라고. 그 남자를 통해 내 이름을 되찾을 수 있다, 라고. 그리고 이런 여자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여자의 이름을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여자는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잠에서 깨어난다. 오해도, 이별도 꿈일 뿐이다. 남자는 아직도 여자의 곁에 있다. 그리고 여자는 남자에게 기댄 채 이야기한다.

[나는 더 이상 당신으로부터 눈길을 떼지 않을 거예요. 쉴새없이 당신을 바라보겠어요.]

[내 눈이 깜빡거리면 두려워요. 내 시선이 꺼진 그 순간 당신 대신 뱀, 쥐, 다른 어떤 남자가 끼여들까 하는 두려움.]

[그냥 당신을 보기만 할 거예요. 밤새도록 스탠드를 켜놓을 거예요. 매일 밤마다.]


02.

그렇지만 정말로 사랑이, 모든 것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사람에게는 사랑만이 희망인 것이 맞을까. 어쩐지 허탈해져서 나는 책을 놓는다. 사랑할 힘이 없다면, 희망을 품을 자격도 없게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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