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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류, 미소수프 본문

피도 눈물도 없이

무라카미 류, 미소수프

dancingufo 2005. 8. 20. 03:04

01.

잠깐 서울을 다녀간 친구는, 고향으로 다시 내려가면서 내 방에 류의 책 두 권을 놓고 갔다. 나는 그 두 권의 책을 책장 위에 고이 올려놓은 채 석달을 보냈다. 그 동안 나는 마저 다 읽지 못했던 로마인 이야기를 읽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얇은 두께의 책 두권을 읽고, 사무실을 오가는 지하철 안에서의 시간은 영화 잡지들로 때웠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나는 더 이상 읽을 책이 없어져갔지만, 매일매일 머리를 빗고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하면서 눈에 띄는 그 두 권의 책은 이상하게도 좀처럼 내 손에 와서 잡힐 기회가 없었다. 나는 그저 잠깐, 아주 잠깐씩 그 책들을 들춰보다가 다시 제자리에 가만히 놓아둘 뿐이었다. 이상했다. 기분이 그랬다. 책의 첫장을 펼치기 전부터, 나는 그 두 권의 책에 거부감 같은 걸 느끼고 있었다. 류에 대한 내 첫기억이, 고통과 아주 유사한 감정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02.

고통. 그래, 그런 것 같다. 나는 한동안 이맛살을 구기고 있다가 책을 덮었다. 이것은 류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반복되는 행위이다. 나는 이런 순간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잘 알 수 없다. 이유는,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자가 이미지를 불러온다. 그것은 문자를 계속해서 바라보기 힘들 만큼 슬프거나 아프거나 하여 고통스러운 이미지다. 나는 잠깐 '그만 읽고 싶다' 라고, 생각을 한다. 나는 글의 힘을 과신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이런 기분까지, 글이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이 싫다.


03.

[그 미팅 펍과 같은 장소는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없다. 더럽기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진지하게 살아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찌되든 상관없는 일을 위해 모두 그곳에 있었다. 이것이 없으면 죽는다는 목적을 가지고 그 가게에 있었던 인간은 한 사람도 없었다. 지배인과 보이도 왠지 외롭다는 이유로 그저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 가게에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죽은 사람들은 모두 그러했다.]

죄의식,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토록 술술 읽히는 류의 소설을, 유난스레 힘들어하는 이유 말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서 류는 망설임없이, 단호하고, 간단하게 말한다. 나는 그런 류의 태도가 멋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남자는 겉멋을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만은 알겠다. 지금 이 남자는 장남 삼아 이러는 게 아니다. 진심으로 화가 나서 이러는 것이다. 종종 그의 말과 생각은 차갑고 단호하게 느껴진다. 그것이, 진심이기 때문이다. 진심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얘기하는 것이다.


04.

'소설은 번역이다. 말을 잃고 허덕이는 사람들의 외침과 속삭임을 번역하는 것이 문학이다.' 라고 류가 말한다. 나는 사람들이 소리내어 표현하지 못한 말을 번역할 힘 같은 것이 '작가'에게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소설을 쓰는 류와, 그렇지 않은 나의 차이는 이런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글의 힘을 믿는 것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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