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2005년 8월 23일, 세 가지 목표 본문

아무도 모른다/2005.05 ~ 2005.12

2005년 8월 23일, 세 가지 목표

dancingufo 2005. 8. 25. 03:44

01.

요즘은 계속 잠이 모자란 탓인지 출퇴근길에 늘 졸게 된다. 가는 데 30분, 오는 데 30분 합산 1시간이니까 그럭저럭 좋은 독서시간이 되어주었는데 그 시간에 졸게 되면서부터는 하루의 독서량이 거의 제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는 책을 많이 읽었던 적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하루에 고작 열장 정도 넘기고 만다면 너무 적은 양이다. 읽고 싶은 책이 많다. 그런데 읽고 있는 책은 거의 없다. 그러니까 인터넷을 끊든지 잠을 이보다 더 줄이든지 해야하는데 전자는 힘들고 후자는 불가능하다. 하여, 자꾸 지친다. 어떻게 살든 책 읽을 시간 정도는 마련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 거다.


02.

저녁을 먹고 지쳐서 책상 앞에 앉아있는데 핸드폰 액정이 반짝 하고 밝아지더니 문자가 도착한다. 이관우가 골을 넣었다는, 함께 대전을 응원하고 있는 동생에게서 온 문자다. 새벽쯤엔 드디어 리그데이가 다시 시작이라며 기뻐해놓고는 정작 경기 시간엔 경기가 하고 있단 사실마저 잊고 있었다. 문자를 받고서야 후다닥 인터넷을 켜보니 대전은 승리하고 있는 중이다. 득점자 명단에 '이관우'라는 이름이 올라가 있다. 이관우. 이관우. 가만히 되뇌어보면 이상하게도 참 특별한 느낌을 주는 이름.

사람들 눈을 피해 인터넷을 하고 문자를 주고 받으며, 9시가 조금 넘어섰을 쯤엔 대전의 승리가 확정지어졌다는 소식을 접한다. 기분이 좋아져서 혼자 빙긋- 웃는다. 이제는 그들이 승리하고 있는 그 자리에 내가 꼭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같은 건 하지 않는다. 아쉽긴 하지만, 내가 보지 못해도 그 승리는 기쁘다. 아쉽긴 하지만, 꼭 내 눈으로 목격하지 않아도 그 승리는 즐겁다. 그 사람들이 승리를 차지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좋다. 오늘 저녁은 마음이 흐뭇해지는 저녁이다.


03.

흐뭇해서 또각또각- 신나게 계단을 내려오면 건물 밖으로는 쏟아지듯 비가 내리고 있다. 일기 예보를 보지 않는 나는 이번에도 우산이 없다. 비가 내릴 때마다 내게 우산을 빌려주고 있는 K는, 이제 자기 믿고 아예 우산을 안 가지고 다니기로 했냐며 눈을 흘긴다.

"비 오는 줄 몰랐어요."
"일기 예보도 안 봐요?"
"그걸 꼭 봐야해요?"

문 앞에 쪼그리고 앉은 채 올려다보면 직접 우산을 펴서 건네주는 K의 얼굴은 어이없음. 접고접고접으면 가방 안에 쏘옥 들어가는 K의 우산은 무척 작다. 다행히도 키가 작은 나는, K의 우산을 써도 비를 맞지 않는다. 살다보면 이렇게 가끔 작은 키가 도움이 될 때도 있다. 그러니까 겨우 이렇게밖에 자라나지 않은 내 키도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야 할 것.


04.

돌아와서 하일라이트 프로그램을 챙겨본다. 왼쪽을 치고 올라가는 이관우를 정확하게 캐치한 공오균의 발에서 공이 떠난다. 벌써 몇년째 한솥밥을 먹은 사이다. 눈 감고도 알아챌 그 패스를 받으면, 달리는 이관우의 모습은 눈부시다. 나는 이관우가 그렇게 달리면, 나는 이관우가 그렇게 슛을 하면, 그것이 골이 될 거란 것을 조금씩 느끼게 된다. 그물이 철렁인다. 이제 우리를 승리에 가까워지게 하는 것은 이관우의 몫. 웃으며 달리는 이관우를 보면, 그 작은 등 뒤에는 날개가 있을 것만 같다. 이관우를 좋아한다. 나 개인, 으로서가 아니라 대전의 팬, 으로서 말이다.


05.

왼쪽에서 올라오는 공을 가볍게 머리로 받아 골대 안으로 집어넣은 것은, 너무나도 김은중스러운 행동이다. 어려운 슛이다. 하지만 김은중은, 모든 슛을 쉽게 한다. 때문에 화려하지 않아 보이겠지만 어차피 나는 화려한 김은중을 기대하는 건 아니다. 어두운 거실에 TV를 켜놓고 앉아, 리플레이되는 김은중의 골을 본다. ...기쁘다. 나는 내가 웃는다는 걸 느낀다. 훌륭한 골이다. 그래서 기쁘다. 변함이 없다. 갈수록, 훌륭해진다. 대전의 선수가 아니라도, 괜찮다. 잘해줘서 기쁘다. 잘해주고 있어서, 무척 기쁘다.

시즌 7호골. 득점부문 단독 2위. 분발하는 거다. 지금부터, 지금보다 더.


06.

문을 열면서부터 춥다고 소리를 질러댄 나 때문일까. 친구는 보일러를 틀어놓고 잠이 든다. 바닥에 등을 대고 잠깐 누워있었더니 곧 온 몸이 더워진다. 아무리 비가 내려 날이 추워도, 8월부터 보일러를 트는 것은 확실히 오바인 모양이다. 꼭꼭 닫아두었던 창문을 다시 열자 빗소리가 크다. 나는 김은중이 비를 맞고 경기하는 걸 싫어하지만, 생각해보면 김은중은 우천 경기에 꽤 강하다. 비가 내리는 게 싫지 않단 생각이 든다. 바보같은 반응들이다. 하지만, 어쩐지 이런 생각들을 하면 즐겁다.


07.

오늘의 목표. 4시가 되기 전에 잠들기. 아침 먹고 출근하기. 푹 자고 일어나서 지하철 안에서 졸지 않기. 일단, 세가지만 달성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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