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2005년 10월 4일, 치즈가루 본문

아무도 모른다/2005.05 ~ 2005.12

2005년 10월 4일, 치즈가루

dancingufo 2005. 10. 5. 02:20

01.

보고서 하나가 돌아왔다. 처음부터 좀 헤매던 것이었는데 시간도 너무 촉박하고 하여 대충 해서 내버린 게 문제였다. 완성도야 어찌되었든 다 끝났다고 생각한 일이니까, 새삼 이것을 다시 하기란 너무 어렵다. 좀 억울하기도 하고, 좀 짜증나기도 하고, 아무리 새로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집중이 안 되는 상태인 것이다. 게다가 나는 바로 이틀전, 좌절과 절망의 구렁텅이에 굴러떨어진 후 아직도 그 웅덩이에서 질퍽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이런 나에게 다시 일을 시작하라 하다니, 상식에 비추어 보아도 이것은 너무나도 인간적이지 못한 처사가 아닌가 말이다.


02.

잘 오던 버스도 내가 기다리기 시작하면 삼십분 동안이나 안 오고, 기다리다 못해 택시를 잡아타면 그 바로 뒤에 기다리던 버스가 와서는- 요며칠 인생이 계속 이런 식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180초쯤 나를 웃게 하는 인물이 있으니, 아마도 그는 내 인생에서 스파게티 위에 뿌려먹는 치즈가루쯤 될 것이다. 그가 주는 즐거움은 너무나 사소하여 하찮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나는 그가 주는 그 하찮음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온 몸으로 감사의 인사를 해보이고 싶어진다. 나는 그와의 어떤 관계맺음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치즈가루를 매일매일 뿌려서 먹어보았자 속이 비릿하거나 체중만 불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내가 스파게티가 먹고 싶어질 때면, 품절되지 않은 치즈가루가 되어 내 식탁 위에 올려져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아마도 나는 세상의 어떤 음식보다도, 치즈가루가 뿌려진 그 스파게티를 사랑하게 될 것이니 말이다.


03.

올봄에 까맣게 염색을 들였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죄다 빠져버려 얼룩덜룩 지저분한 상태로 지낸 지도 꽤 되었다. 다시 염색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벌써 한 달. 적당한 시간을 잡지 못해 이 달도 이렇게 보내는가 싶은데, 때마침 구세주가 나타나시어 소장으로 하여금 나에게 미용실 갈 시간을 주게 하셨다. 그 남자는, 소장의 말에 따르면 착실하고 바르며 생각이 열려있는- 매우매우 괜찮은 남자이다. 내 생각에 의하면, 착실해 뵈고 말투도 상냥하고 바른 국어도 사용할 줄 알지만 그다지 재미있거나 유쾌하지 않기 때문에 그저 그런 남자이다. 소장은 이 좋은 토요일에 데이트나 하라며(하지만 오늘 헤어스타일은 절대로 이쁘지 않다며) 퇴근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나를 미용실로 보냈고 덕분에 나는 미루고 미루던 염색을 다시 했다. 그리고 나름 예의를 갖추어 사무실 근처까지 와준 그 남자를 만났고, 그다지 맛있거나 맛없지 않은 식사를 했고, 그다지 분위기가 좋거나 나쁘지 않은 찻집에서 차를 마셨다. 대화는 그다지 재밌거나 지겹지 않았고, 그 남자는 그다지 좋거나 나쁘지 않았다.


04.

대부분의 타인은 그런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의 타인은 그다지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물론 대부분의 타인, 이니까 몇몇은 특별히 좋거나 특별히 나쁘다는 뜻이다. 나의 문제는 특별히 나쁜 사람에게는 '당신, 재수없어.'라고 말할 수 있지만 특별히 좋은 사람에게는 '당신이 무척 좋군요.'라고 말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진심은 들키고 싶은 만큼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런 진심을 1%라도 가지고 있는 이상, 그 남자가 아무리 괜찮은 남자라 한들 앞으로 세번을 더 만나고 다섯번을 더 만나고 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겠는 하루였다.


05.

어쨌든 소장이 그 남자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내 까만 머리는, 다행히 내 마음에도 들고 소장의 마음에도 들어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며칠만에 보는 주완이가 연구실로 들어서자마자, 선생님 머리 바꼈네요- 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한다. 이쁘지? 어울리지? 라고 나는 농담으로 묻는데, 제법 진지한 얼굴로 쳐다보다가 네- 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 일단은 주완이의 마음에도 들었다. 이제 남은 것은 승룡이의 평가 뿐이니, 대표팀 명단 발표를 기다리는 김은중의 심정으로 나는 내일 만날 승룡이를 기다려야지. 그 녀석만 이 머리가 어울린다고 하면 100%의 성공을 거둔 이 까만 머리로 올 가을 반드시 행복하게 지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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