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2005년 10월 7일, 옛날옛날에 본문

아무도 모른다/2005.05 ~ 2005.12

2005년 10월 7일, 옛날옛날에

dancingufo 2005. 10. 8. 03:29

01.

멍하니 앉아있고는 한다. 생각해보면 믿기지 않는 행운들이다. 그 날은 비 내리는 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약속시간을 맞추기 위해 미친 듯이 달리는 친구의 차 속에서, 어쩌면 니가 벌써 그 자리를 떴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다. 사실은 난, 니가 그 자리를 떴을 리가 없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내가 너를 꼭 만나게 될 거란 생각을 하면서 너에게로 달려간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내가 내렸을 때, 내 발이 그 질퍽한 땅을 찰팍 하고 밟았을 때, 우산을 받쳐들고 너에게로 걸어갈 때, 너는 끼익- 하고 유리문을 열어보인다.

[들어오세요.]
[...]
[혼자왔어요?]

나는 우산을 접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나는 네가 열어준 문 안으로 들어서며, 이 두 마디는 평생 내 기억 속의 네 뒤를 졸졸졸 따라다니게 될 거라 생각을 한다. 나는 너를 만나고도 할 말이 없어 가만히 너를 본다. 너도 나를 마주치곤 할 말이 없어 가만히 웃고 있다.


02.

[추워요. 따뜻하게 입고 나가세요.]

나는 얇은 블라우스가 막아주지 못한 추위에 꽤나 고생을 한 후이다. 다행히 네가 걸친 윗옷은 보송보송 털이 나서 따뜻해 보인다. 마주본 너는, 생각보다도 더 키가 크다. 학생이에요? 서울에서 오는 길이에요? 프로필이라도 작성하듯 묻고 있지만 사실 넌 조금쯤 심심하고 조금쯤 어색할 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감격만이, 그 날의 나를 지배하고 있다.


03.

그 날 이후로 너는 내게, 언제나 그런 식으로의 감동과 같은 것으로 남는다. 나는 네가 이야기한 시간보다 정확하게 1분을 이르게 도착했지만, 너는 1분 후에 그 자리를 뜨기는커녕 꼬박 30분을 더 내 앞에 서있다. 쓰잘데기없는 이야기들이 오고가고, 생각지도 못한 말들이 오고가고, 나는 너의 손을 보다가 나는 너의 얼굴을 보다가 네가 종종 나를 보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그 때는, 시작이었다. 생각해보면 그 날은, 시작이었다.


04.

그 후로, 너는 얼마나 또렷이 내 얼굴을 보았는지. 얼마나 자주 내게 웃어보였는지. 멍하니 앉아 나는 가끔 생각을 한다. 이제는 네가 없는 그 자리에 앉아서, 언젠가는 바로 이 곳에 네가 있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기적처럼 너를 만나고 마주쳤던 기억은, 지금의 시간들을 견디게 하는 힘이다. 더 이상 너는, 짧은 반바지에 슬리퍼를 끌면서 내 앞에 나타나주지 않지만- 지금도 나를 끊임없이 견디게 하는 것은 분명히 네가 선사한 행운. 비가 내리는 골목길을, 우산을 받쳐들고 걸으며 문득 그 때 그 유리문 안에서 너를 향해 걸어올라가는 나를 보았을 너를 떠올려 본다. 친절하게, 문을 열고 인사를 하고 '들어오세요.'라고 이야기하던 너를 떠올려 본다. 그 때 너의 손짓은, 그 때 너의 목소리는, 기억 속의 네 뒤를 졸졸졸 따르며 하루도 빠짐없이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 기억들이 없었다면 나는 이렇게 너를 올곧게 지켜내지 못했을 거라고, 너는 듣지 못할 만큼의 목소리로 너는 알아채지 못할 만큼의 얼굴로 고백하는 것이다. 그 추억들이 이렇게 나와 내가 소중히 여기는 너를 잘 지켜내주고 있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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