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2005년 10월 9일, 달콤한 잠 본문

아무도 모른다/2005.05 ~ 2005.12

2005년 10월 9일, 달콤한 잠

dancingufo 2005. 10. 9. 21:27


01.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났을 땐 사실 고민을 하게 된다. 요즘 들어선 더더욱 한번 든 잠을 깨기가 힘들기 때문에, 그 상태를 이기고 TV를 켜기란 쉽지 않다. 이대로 그냥 자버릴까. 나중에 재방송이라도 보면 되지 않을까. 아니면 다운을 받아 보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내 마음은 점점 더 침대 위로 다시 올라가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이다. 사실 홍명보나 김은중이 아닌 이상, 그것은 라울이라 할지라도 몰려오는 졸음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기란 쉽지가 않다.


02.

하여 그렇게 놓치는 경기들이 꽤 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잠에 약한 인간인 탓이다. 하지만 오늘 새벽에는, 말끔히 잠을 이겨내기 위하여 고민하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당장 욕실로 달려가 양치를 해버리는 것으로 라울에게 승리를 안겨주기로 한다. 어차피 지난 경기이고 결과도 모두 다 알고 있으니 이번에야말로 경기는 다운받아 봐도 되잖아- 생각한 후 자버려도 좋았을 것이나, 이번 경기는 지금까지의 그 어떤 경기와도 다른 특별함을 가지고 있으니 바로 나의 '기록의 사나이'가 진짜 '기록'을 세우는 경기이기 때문이다. 라울은 물론 나에게 김은중보다는 좀 덜 중요하고 좀 덜 특별한 존재지만, 그래도 그렇게 특별한 순간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그런 것을 챙겨서 보는 것은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팬임을 자청하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와 같은 것이다.


03.

김은중은 비바람에도 끄덕않고, 사시사철 늘 푸른 소나무 같은 사람이지만. 사실 그런 점은 굉장히 믿음직스러울 뿐 특별히 감동적인 구석이라곤 없다. 그러니까 김은중은 끊임없이 마음을 흔드는 라울의 한숨이나, 얼굴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쓰윽- 하고 걷어내는 라울의 지친 손짓 같은 것은 가지지 못했다. 물론 이런 것에 감동하는 것은 굉장히 감성적인 태도로써, 축구를 좋아하는 데 특별히 도움을 주지는 않는다. 하여 나는 라울 곤잘레스의 무엇이 그렇게도 위대하고 훌륭한 지 설명해 보라하면 그다지 많은 말을 하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라울 곤잘레스가 위대하고 훌륭하다는 것을 믿는 마음에서만은, 그 어떤 투철한 신념과도 맞먹을 수 있게 흔들림이나 의심의 여지를 두지 않고 있다. 나에게 라울은 아주 자주 마음을 흔드는 첫사랑의 그림자같은 것으로 남겨진다. 라울의 얼굴은, 라울의 손짓은, 라울의 움직임은 낮은 바람에도 소리를 내는 버드나무의 잎사귀처럼 약하고 불안하며 보드랍고 아름답다. 나는 이 선수가 달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자주 생각하는 것이다. 아, 축구란 아름답구나- 하는 것. 아, 축구를 하고 있는 이들은 정말로 아름답구나- 하는 것을 말이다.


04.

진부하기 그지없는 표현으로, 그렇지만 그보다 더 어울리는 말이 없는 표현으로, 자로 잰 듯한 제 동료의 패스를 받은 것은 라울이다. 살짝 머리를 가져다대자 그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골대 안 그물을 출렁이게 만든다. 손을 번쩍 들고 달려가는 라울 곤잘레스의 모습은, 세상의 그 어떤 선수의 몸짓보다 아름답다. 내가 좋아하는 두 선수는 그렇게 두 가지의 태도로써 존재한다. 어떤 골을 넣어도 재미없는 표정을 지을 뿐인 김은중과, 어떤 골을 넣어도 세상을 다 가진 듯 환호하는 라울 곤잘레스.


05.

이 선수를 좋아하게 된 것은 우연이었고, 나는 그 우연이 이렇게 큰 감정을 만들어 낼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 어이없이 빗길을 미끄러지다 툭 하고 멈춰서보니 눈 앞에 라울이 서있었다. 심심해서 연애를 시작하는 연인들처럼, 라울을 처음 좋아했을 때는 그랬다. 언제부턴가 이 선수가 한숨을 쉬는 것이 싫어서 레알 마드리드의 승리를 간절하게 바라게 됐다고 고백하면, 나도 그런 내 자신이 우스워진다. 푸른 잔디에 첫발을 내딛으며 잔디에 키스를 보내고, 휘슬이 울리는 순간 잔디를 손으로 만져본 후 달리고, 자신의 국가가 흘러나오는 동안 굳게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재미삼아 시작한 이 연애가 대충 끝이 나지는 않을 거라 짐작한다. 라울은 아주 자주 내 마음을 흔든다. 그것은 약하고 불안하지만 보드랍고 아름답기 때문에 외면할 수 없다.


06.

가끔 나는 라울 곤잘레스가 자신의 국민들에게서 받고 있는 사랑이 부럽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캡틴으로서 라울 곤잘레스를 사랑할 수 있는 그 나라의 국민들도 부럽다고 생각한다. 절대로 스페인의 축구가 대한민국의 축구보다 중요하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때로는 스페인의 국민이 되어 라울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은 것이다. 이 선수의 까만 머리카락이나 까만 눈동자는 내가 금발머리나 푸른 눈동자를 가지지 않은 것을 기뻐하게 만들고, '스.페.인'이라는 글자를 발음할 때면 종종 낭만과 행복의 감정에 사로잡히도록 만든다. 무엇을 바라는 걸까, 생각할 때면 나는 라울 곤잘레스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것을 깨닫는다. 승리로 인해 웃고, 영광으로 인해 웃고, 행복으로 인해 웃는, 나는 라울 곤잘레스가 웃는 모습을 바라는 것이다.


07.

새벽의 경기는 2-1. 오후의 경기는 2-0으로써, 결국 라울의 클럽과 라울의 국가는 모두 다 승리를 지켜낸다. 나는 조금쯤 행복해져서 꿈도 기억나지 않는 깊은 잠에 빠진다. 그것은 이 달콤한 선수가 내게 선사한, 무척이나 달콤한 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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