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2005년 11월 3일, 반짝 본문

아무도 모른다/2005.05 ~ 2005.12

2005년 11월 3일, 반짝

dancingufo 2005. 11. 4. 04:11

01.

11월이 왔다. 사흘전 일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서둘러 이 나라로 돌아온 것이 올초. 그리고 아직 이 나라에 제대로 적응도 못한 것 같은데 벌써 11월이란다. 나는 아직도 중국에서 갓 돌아온 듯한 기분인데, 내가 이 나라로 돌아와서 한 해를 거의 다 보내고 있는 중이란다. 이렇게 시간이 제멋대로 흐르는 것을 벌써 26년이나 겪어왔건만 여전히 이 속도에는 면역이 되지 않는다.


02.

출근을 하려고 집을 나서는데 주문해뒀던 책장을 가지고 오고 있다고 전화가 걸려온다. 10분 안에 도착한다는 말에, 지하철 역에 내려 택시를 타고 가면 10분쯤 절약할 수 있으니까 그냥 기다리기로 한다. 그렇지만 꼭 급할 땐 반드시 걸리고 마는 코리안 타임이랄까. 책장이 도착한 건 그로부터 25분 후이고, 책장을 나르고 방에 들여와서 바닥에 똑바로 서있을 수 있도록 세워두는데 다시 10분. 결국 바로 어제 지각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은 소장을 난 하루도 지나지 않아 보기 좋게 물먹여버리고 만 것이다. 매일매일의 하루가, 참 여러가지 방법으로 꼬인다.


03.

그래도 다시 집으로 돌아와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책들을 정리해두니 책장이 꽉 차서 기분이 좋아진다. 많은 책들을 중국에 두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중국 갈 적에 한국에 두고 갔던 책들도 꽤 됐던가보다. 놀랬던 것은, 나는 내가 국적 가리지 않고 소설을 참 즐겨본다고 생각해왔고 그것이 사실이기도 한데 막상 책을 꽂아놓고 보니 소설책은 몇 권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정작 긴 한 칸을 꽉 채운 것은 한국문학통사라든가, 고대국어 형태론, 국어 음운학, 1960년대 문학연구와 같은 나의 전공책들. 내가 저런 책들을 가지고 있었던가, 새삼 놀라워 한 권 한 권 훑어본 후에 제 자리에 다시 꽂아놓는다.



04.

내가 대학을 다니는 동안 경제적 여건이 되는 한도 내에서, 웬만하면 전공책들을 사려고 노력한 것은 수업을 열심히 듣고자 함도 아니었고 시험을 잘 치고자 함도 아니었다. 딱히 국문학과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나도 원하던 과를 못가서 성적 맞춰 대학간 사람 중 한명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대학을 다니는 동안 내 전공과목을 꽤 좋아했다. 웬만하면 시간표를 전공과목으로 채운 것도 그런 이유였고, 성실하게 수업에 참여하지는 않아도 최소한 전공책들을 사서 한번씩이나마 훑어본 것도 그런 이유였다. 난 별로 좋은 대학을 가지 못했다는 사실에 늘 열등감을 느꼈고, 나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한 그 대학 내에서마저 우수한 성적을 거두지 못했지만, 어울려 다닐 만한 친구들도 없었고, 존경할만한 교수님들과 가까이 지내보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내 대학 생활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던 것은 내가 내 전공과목이 가지고 있는 매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가끔 후회가 되는 것은, 나 자신이 성실하지 못한 대가로 하여 좋아하는 것에 대한 지식을 충분하게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요즘 들어서 더더욱 그렇지만 난 내가 대학에서 너무 적은 지식만을 얻은 것이, 그리고 그것이 순전히 내 탓이라는 사실이 조금 아쉽다.


05.

책들을 만지느라 더러워진 손을 다시 씻고 먼지가 날렸을 게 분명한 이불을 탁탁 털고 청소기로 깨끗하게 방을 청소한 후에 침대에 누워 책장을 바라본다. 한 권 한 권 책제목을 눈으로 훑다가 문득, 한 때 내가 가지고 있었던 게 분명한 몇권의 책들이 지금은 내게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것은 누구에게 빌려줬던 것 같고, 이것은 고향집에 있는 것 같고, 이것은 작은 언니와 살던 때 그곳에 두고 온 것 같기도 하고, 이것은 중국에 두고 왔는지 어떤지 기억이 나지 않기도 한다. 자주 자리를 옮겨 산 흔적은 이런 것에서 발견되고는 한다. 세어보니 스무살 이후 나는, 지금까지 열 번의 이사를 했다.


06.

사람이 뭔가 한 가지를 가지게 되면, 그 다음 또 다른 뭔가 한 가지를 가지고 싶어지기 때문에 자유롭고 싶다고 울부짖으면서도 계속해서 일에 묶여 살게 되는 것인가보다. 정말로 솔직하게 난 그다지 가지고 싶은 것이 없고, 물건에 대한 욕심이래봤자 책이나 CD같은 것이 전부이므로 그다지 돈이 들 것이 없다. (물론 그 외에 치마 욕심이 있기도 하지만, 내 치마들 역시 다 부담없는 가격의 것들이다.) 그런 점에서 나이가 들어도 이런 성향만은 반드시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더 큰 책장을 가지고 싶긴 했지만, 절반의 책장만으로도 내 책들을 보기 좋게 꽂아둘 수 있었으니 말이다. 묶여있게 되면 난, 빛을 잃을 것이다. 그 때는 더이상 아무리 노력해도 다시 반짝거리는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이다.


07.

반짝. 나는 아름답지 않은 것은 괜찮지만, 빛을 잃는 것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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