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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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른다/2005.05 ~ 2005.12

2005년 11월 13일, 긴 일기

dancingufo 2005. 11. 14. 02:38

꼬박 열 두시간을 잤다. 일어나고 싶지 않았지만 열 두시간을 잤다는 걸 깨닫고나자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열 두시간이나 잤지만, 오랜만에 푹 잔 것이라 그런지 기분이 말끔했다. 문을 열고 나가 세수도 하지 않고 오후 4시의 모닝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마시고나자 머리도 곧 말끔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조금 춥고 조금 스산했다. 
 
오후 4시의 아침식사는 많이 타버린 토스트와 과자와 감이었다. 이제 갓 머리를 감았다는 친구와, 세수도 하지 않은 나는 식탁 앞에 앉아 열심히 살지 말자는 슬로건에 너무 심하게 동감하는 우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삼미 슈퍼스타즈에 대해서 얘기했고 친구는 금요일에 보고 왔다는 뮤지컬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는 이터널 선샤인에 대해 이야기해주었고 친구는 또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수다를 떨며 앉아있자니 이 여유가 마음에 들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아침식사가 끝나자마자 나는 또 금세 바빠졌고 어느 새 내 앞에는 사무실에서 싸들고 온 A4 용지가 잔뜩 널려 있었다.  
 
바짝 내 가까이로 다가온 11월의 말은 두 달에 한번 있는 우리 사무실의 마감이건만, 제 버릇 개 못준다고 또 제 때 제 때 일을 못해둔 나는 몇달만에 외출 않은 일요일을 밀린 일 하기로 보내야 했다. 그렇다고 이 하루가 지나면 밀렸던 일이 싹- 하고 소리내며 깨끗하게 사라져버리는 건 아니지만, 어쨌건 밀려있던 것의 18%쯤은 끝낸 듯 했다. 날이 캄캄하게 어두워졌을 땐 더 이상 A4 용지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것들을 찢어 없애고 싶을 것 같아서 티비를 켰다. 마침 나를 반겨주는 레알 마드리드의 사라고사전 경기가 하고 있어서 그것을 보고, 스웨덴과의 평가전을 15분만 다시 본 후 컴퓨터 앞으로 돌아와 앉았다. 시선을 내려 컴퓨터 시간을 보니 어느 새 자정이 지나있어서 나는 으악-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너무 피곤했다. 피곤이 잦은 것은 원래 튼튼하지 못한 탓인 건지, 더이상 튼튼하지 못해서 그런 건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요즘은 너무 자주 피곤했다. 하드 정리를 좀 해줘야겠단 생각이 들었지만 더 이상 컴퓨터 앞에 앉아있기도 싫고 그렇다고 다시 아직도 무지막지하게 남아있는 일을 하기도 싫어서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웠다. 두 다리를 편히 뻗고 두 팔을 힘없이 바닥에 떨어뜨리자, 이렇게 넓지 않은 바닥에도 100% 몸을 뻗고 누울 수 있는 내 짧은 팔다리가 갑자기 좋아졌다. 그렇게 내 사랑스런 팔다리를 보듬은 채 고개를 돌려보니 지저분한 침대 밑이 보였고, 내가 이렇게 청소를 안 하고 살았던가 싶어서 다시 고개를 돌리는데, 전신 거울 밑으로 무언가 반짝반짝 내 눈을 사로잡는 것이 보였다.
 
뭘까? 귀걸이일까? 내가 저런 모양의 귀걸이가 있었던가?
 
궁금한 마음이 일었다. 움직이는 것이 귀찮긴 했지만 그래도 무엇이 저 좁은 틈새에 들어가있나 궁금한 마음이 더 컸기에 결국 나는 팔을 뻗어 그 반짝거리는 물체를 잡았다. 그러니까 그것은, 이미 출국심사를 마치고 GATE안으로 들어가버린 줄 알았던 김은중이, 내가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은행 앞에서 환전을 하고 있던 것을 마주쳤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그 김은중의 팔을 잡아 아직 안 갔네요- 라고 말할 때와 같은 기분. 나중에 태국에서 뵈요- 라고 인사할 수 있던 때와 같은 기분. 반갑고 좋은 기분. 유쾌하고 멋진 기분.  
 
그것은 확실히 놓친 것을 다시 잡은 기분이었다. 뜻하지 않은 행운에 활짝- 나는 웃었다.
 
 
 
 
어떻게해야 할지 몰라서 슬플 때가 많았다. 그 상실감은 어떤 식으로도 치유가 안 될 거라는 것이 처음부터 명백해서, 난 다시는 아무것도 가지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을 정도였다. 많은 것들이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농담처럼 나로 하여금 죽고 싶다는 말을 하게 만들었고 나는 그렇게 말하는 내가 더없이 유치하면서도 그 마음을 무시하는 것 말고는 대처방법을 모를 만큼 속수무책이었다. 삶은 종종 그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잃었던 것을 다시 되찾는 행운 같은 것, 삶이 내게 준 적은 한번도 없었다.
 
이쯤에서 전환되었으면 좋겠어. 여기서 방향을 틀고, 새롭게 말이야.
 
나는 손에 든 [C-F-C]를 핸드폰에 아직 매달려있던 [D]에 연결해 꽂았다. 딸랑딸랑, 예쁘게 반짝거리는 것이 기분 좋아 잠깐 쳐다보다가 3번을 길게 눌러 동생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녀석은, 또다른 DCFC가 준비되어 있지만 그것은 다른 색깔의 것이니 괜찮을 거란 말을 전했다. 나는 두 개의 DCFC가 생겨서, 두 배로 즐거워졌다. 
 
 
 
문득 나는 내가 널 잊지 않는 것에 동의했단 사실을 떠올렸다. 너를 기억하는 것이 내가 가진 행운 중 하나라는 것을 인정하기로 한 사실을 떠올렸다. 다시 널 만나고 싶다거나, 다시 널 곁에 두겠다는 욕심만 없다면 더 이상 넌 나한테 미련이나 울음 같은 걸 가져다주지 않는 착한 아이가 될 터였다. 지금까지도 못되먹고 잔인하고 냉정한 놈으로 네가 산 것은 내 탓이란 사실도 깨달았다.
 
훌쩍. 나는 눈물을 닦기로 했다. 새롭게, 이든 그냥 그렇게, 이든 더 이상은 넌 아니라는 것만 인정하면 되는 문제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한없이 마음이 편해졌다. 인생이 전환될 것이었다. 여기서 방향을 틀고, 새롭게 말이다.
 
 
 
하늘색 예쁜 겉장을 가진 류의 책을 손에 들었다. 앞으로 해야할 것, 을 뜻하는 왼쪽에 쌓인 A4 용지들은 내일이나 내일 모레. 또는 그 내일이나 그 모레에 해결하기로 했다. 오늘의 BG로 선택한 것은 오랜만에 주걸륜의 체리향. 그리고 나는 시체처럼 침대에 엎드리고 누워서 책을 읽었다. 새벽이 깊어가고 있는데도 졸리다거나 두통이 일지 않아 머리가 말끔했다. 책장을 몇 장 넘기다보니 이렇게 여유롭고 평화로운 휴일은 참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여유롭고 평화로워서 문득 일기를 쓰고 싶어졌다. 손에서 책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고, 내 블로그로 들어와 새글쓰기 버튼을 누르고, 자판 위로 두 손을 가만히 올려놓으면, 오늘의 일기는 긴 일기가 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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