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2005년 11월 20일, 보지 않는 것이 옳은 축구 본문

아무도 모른다/2005.05 ~ 2005.12

2005년 11월 20일, 보지 않는 것이 옳은 축구

dancingufo 2005. 11. 21. 03:32

01.

꿈에서, 라울을 보았다. 다리가 무척 아파보였다. 나는 괜찮냐고 물었다. 웃으면서 괜찮다고, 마멘이 대신 대답했다. 꿈에서 깨어난 후 나는 잠깐 라울을 생각했다. 바보처럼 혼자서 다쳐버린 라울을 생각했다.


02.

때로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은, 레알 마드리드의 패배가 대전의 패배보다 더 고통스럽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이 지구상에서 내 팀이라 부를 것은 대전 시티즌 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레알 마드리드의 패배가 괴로울 때마다 생각을 다시 해야만 했다. 양다리를 걸치는 격이겠지만, 이건 정말 내 두번째 팀인 듯 했다. 안 보면 그 뿐, 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꽤 이 팀을 좋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03.

얼마나 바보같고, 한심하고, 우스꽝스러운지. 그 이름들이 너무나 휘황찬란하기 때문에, 더더욱 레알 마드리드의 패배는 비웃음과 어울렸다. 나는 저를 둘러싼 네 명의 수비수들 안에서 어찌할 바 모르던 호나우도를 보았고, 차마 빠르기를 따라잡을 수 없는 상대팀의 꼬마녀석에게 속수무책 길을 내주던 지단을 보았다. 바보같다고 생각했고, 한심하고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다. 화를 내고 싶었고 욕해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좀 아팠다. 화를 내고 욕을 내뱉을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좀 아팠다.


04.

시작부터 패배와 가까운 경기였고, 혼과도 같은 라울을 잃은 후엔 이 상황을 역전할 수 있을 거란 희망조차 없었다. 추운 거실에 혼자 앉아 겉옷을 여미며 때로는 보지 않는 쪽이 더 옳은 축구에 대해서 생각했다. 전반전이 끝나자마자 심판에게 불같이 화를 내며 락커룸으로 들어가버리던 구티가 보였다. 도저히 경기에 출장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건만, 어여쁜 금발머리를 묶고 입술을 올곧게 다문 채 라울의 완장을 물려받은 후 잔디를 밟았다. 저들은 저렇게 달리는 동안에는 몸이 아프다는 가장 원초적인 감각조차 잊을 수 있는 걸까- 나는 궁금해졌다. 구티가 달리는 모습은 어쩐지 슬펐다. TV를 꺼버린 것은 바르셀로나의 세번째 골이 들어가던 순간이었다.


05.

누군가 패배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승리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똑같이 누군가에게 잔인한 패배를 안겨줄 때 내가 얼마나 지독하게 승리의 기쁨을 누렸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때때로 어떤 패배는 너무나 슬퍼서, 부들부들 온 몸이 떨리곤 했다.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누우면서 부들부들, 이 패배를 안긴 빌어먹을 상대팀 선수들에게 저주를 퍼부어야만 했다.


06.

그래, 축구는 인생의 좋은 핑계거리다. 이것 때문에 슬프고 아프다며 삶에게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것이다. 하여 난 이 패배를 극복하지 못하는 척 하며, 오래오래 이불 속에 누워있었다. 덕분에 꿈에서 라울을 만나고 다시 또 꿈에서 마멘을 만났다. 나는 라울과 마멘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라울은 웃었고 마멘은 괜찮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웃고 싶지 않았고 괜찮다고 말할 수 없었다. 이 패배가 싫다. 이 축구는 보지 않는 쪽이 옳았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