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2006년 2월 13일, 평화가 깃든 시간 본문
비가 내린다. 추적추적- 이라고 표현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진부하단 생각이 들어서 관둔다. 옷을 갈아입으려다 멈추고 책상 앞에 앉는다. 의자를 사니 좋다. 바닥에 주저앉는 것은 왠지 서글픈 느낌이 드는 일이다.
돌아보니 금세 책상 위가 지저분해져 있다. 휘적휘적 치워버리면 그만인데 괜스레 성가셔서 그것도 관둔다. 활짝 열어둔 창문으로는 빗소리가 들린다. 오늘은 꽤 따뜻한 날이다. 맨다리를 감아도는 공기도 그다지 차갑지 않다.
이런 기분을 말한 것일까. 언젠가 자신은 자주 이유없이 행복하다고 말했던 그 여자의 말 말이다. 난 그 때 그 여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난 행복을 꿈꿔본 적도, 행복하단 기분을 느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어쩐지 이렇게 지저분한 책상 앞에 앉아서 등 뒤에서 울리는 빗소리를 듣고 있자니 조금은 평화로운 기분이 든다.
난 그 때 그 여자와의 연락을 매몰차게 끊었다. 그 여자의 마음이 슬픔이나 외로움에 너무 가까이 있고, 그 여자의 처지가 안쓰러움이나 궁상맞음과 너무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난 그런 마음에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다. 난 그냥 웃어버리거나 침묵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 했다. 난 그래서 뒷걸음 칠 수밖에 없었다. 관계에 대한 책임을 논하기 전에 그러는 쪽이 옳은 것 같았다. 변명은 안 되는 것이겠지만, 그래서 난 그래야만 했다.
평화, 가 깃든 시간이 온다. 눈도, 생각도 쉬어야 하는 시간. 동그랗고 까만 아이의 눈동자같은 것. 고개를 갸웃- 하며 나를 보는 아이의 표정같은 것. 그런 달콤함만이 감도는 시간. 나는 그런 시간을 누린다. 이런 것은 천상의 시간인지도 모른다. 죽음의 시간과도 닮은 것 말이다.
나중에는 이렇게 평화로운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의 모든 잘못들도 용서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때로는 아주 낯선 타인만이 나를 위로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말을 하는 나 때문에 상처받는 너에게도, 끝까지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