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웠던 것 같다. 아버지가, 아이의 손을 놓친 그 순간부터. 절뚝, 거리며 아이가 일어서던 그 순간부터. 소중한 존재를 잃어버리는 것은 얼마나 순간인가. 인간이 인간을 잃고 다시 되찾을 수 없는 것도 얼마나 순간에 일어나는 일인가.
그런 공포를 준다. 봉준호는 나에게, 무엇을 미워해야 하는지 무엇에게 화를 내야 하는지 알 수 없게 만드는 그런 공포. 살인의 추억을 보고, 다시 보면서 박해일이 범인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분명히 범인의 얼굴을 하고 있던 그 남자가, 나중엔 결국 불쌍해져서 그렇다면 우리는 대체 무엇을 향해 돌을 던지고 손가락질을 해야 하는 것인가- 그런 생각에 막막했다. 그 막막함이, 참 무서웠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 막막함을 마주친다. 한강에서 몇십년을 이물로 살면서, 괴물도 괴로웠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저 흉폭하기만 한 존재라면 왜 어떤 인간은 먹어치우고 또 어떤 인간은 그냥 가둬두기만 하는 식의 히스테리를 부리겠는가. 감정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시시때때로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 괴물에 맞서서, 소중한 아이를 잃어버린 가족들이 나선다. 이것은 피해자 대 피해자의 구도다. 어느 한쪽이 절대악이라면 영화를 보는 동안 마음이 불안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이렇게, 누구를 향해 화를 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그들끼리 싸우고 있으면 마음이 막막해진다. 그 막막함 때문에 무섭다.
결국 이 사건도 <살인의 추억>의 연쇄 살인 사건처럼 해결되지 못하고 그대로 남는다. 아이는 죽고, 괴물도 죽지만 이 사건을 일어나게 한 원인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현서를 잃고, 여전히 한강변에서 총을 치켜들고 있는 송강호 앞으로 언제 또 괴물이 닥칠지 모르는 일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눈 내리는 한강 공원. 평화로운 듯한 그 공간으로, 언제 또 괴물이 들이닥쳐 인간을 집어 삼키고 소중한 존재를 앗아갈지도 모른다고.
그런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하나의 괴물을 무찔러도 또 다른 괴물이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는 그런 세계를 말이다.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다. 만드는 이들은 아마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박수를 쳐주고 싶다. 보는 나도 이렇게 기진맥진하고 말았으니까, 만드는 동안에 그들은 훨씬 더 많이 힘들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