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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하탄

dancingufo 2007. 12. 27. 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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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크리스마스가 찾아왔다. 크리스마스만 되면 어째서 우리가 난리법석인지 모르겠단 말을 하면서도, 이날을 얼마쯤 특별한 날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여행을 가든 책을 보든 영화를 보든 이 날에는 조금 특별한 일을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2년 전에는 책을 읽었고 1년 전에는 여행을 갔으니 올해는 영화를 보기로 했다.

무엇을 볼까, 라고. 이브날 저녁 생각을 하다가 책장 속에서 <맨하탄>을 발견했다. 생각해보면 지난 1월에 생일 선물로 받은 것을, 조금은 특별한 영화니까 조금은 특별한 날 보자고 책장 맨 윗칸에 올려놓은 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것을 손에 쥐고, 비닐을 벗겨내면서, 이 영화는 크리스마스에 꽤 잘 어울리는 영화가 될 거란 생각을 했다. 비록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신경 과민증 환자 같아 보이는 노인이지만, 그런 감독이 만든 영화가 그다지 낭만적일 리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냥 그런 생각을 했다. 달콤쌉싸름한 냄새를 풍기는 로맨틱한 제목의 영화들보다는 우디 알렌의 <맨하탄>쪽이 나의 크리스마스에는 더 어울리는 영화일 거라고.

사람들은 우디 알렌을 두고 지나치게 말이 많다고들 하지만, 나는 그의 영화에 텍스트가 넘쳐난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 오히려 이미지보다는 텍스트로서 의미를 전달하는 그의 방식이 받아들이기 편하다. 덕분에 그의 말들을 듣고 보고 읽는 사이, 순식간에 지나쳐가는 이미지는 놓쳐버릴 때가 많다. 그래서, 이 영화가 뉴욕을 아주 아름답게 담아냈다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그랬지만.

그래도 아이삭과 메리가 강을 바라보며 밤을 지샌 후 맞은 그 새벽의 모습만은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사랑이라는 것이 불륜이나 배신의 연속이라고는 하지만. 외로워서 누군가를 찾고, 외로움이 달래지면 누군가를 버리고, 다시 외로워지면 버렸던 이를 또 찾아나서는 식의 사랑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런 순간이 있었으니까. 함께 강을 바라보며 밤을 지샌 후에 맞은, 그런 새벽이 있었으니까. 사랑이 그렇게 못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오로지 그러한 단 한 순간을 위해서라도, 사랑은 한 번 해볼만한 게 아니겠느냐는 그런 생각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괴팍하고 신경질적으로만 보이던 우디 알렌의 얼굴이 조금 귀엽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에 숨어있던 낭만을 본 것 같았으니까. 쿨한 척 굴어도 사실은 그의 심장에 역시 낭만이 살아있음을 본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아름다운 사랑의 '한 때'를 포착할 수 있는 우디 알렌이야말로 진정한 로맨티스트- 라고 혼자 생각을 해보았다. 사실 그가 로맨티스트가 아니라면, 그 모든 구질구질해 보이는 사랑의 끝에 마지막으로 던지는 말이 '사랑을 좀 믿으세요.'일 리가 없다는 생각도 함께 말이다.

꽤나 수줍게, 하여 꽤나 능수능란하게 숨겨져 있던 한 노인의 낭만을 보아버린 기분이다. 덕분에 이 크리스마스의 저녁이 즐거워서, 앞으로도 오래오래 크리스마스가 저물어가는 저녁에는

문득, 문득, <맨하탄>의 새벽에 대해 생각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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