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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스 레싱, 생존자의 회고록. 본문

피도 눈물도 없이

도리스 레싱, 생존자의 회고록.

dancingufo 2008. 11. 9. 02:31


책을 덮으면서 피식하고 흐뭇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 꽤 이 작가와 친해진 기분이다.

도리스 레싱이 쓴 SF라면 바로 이런 느낌의 글일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딱 내 예상처럼 진행되는 이야기에, 내가 그 동안 레싱의 책을 열심히 읽긴 했나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싱은 세상이 변해가는 모습에 대해 그 어떤 구체적인 설명 없이도 두고두고 명작으로 남을 SF소설을 써냈다. 나는 어쨌거나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선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이지만, 그래도 이런 환상 소설이라면 좋아하지 않을래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야기는 '나'의 집에 '에밀리'라는 여자아이가 찾아오며 시작한다. 그리고 '나'가 '에밀리'를 지켜보면서 이야기는 진행되고 '나'가 '에밀리'와 함께 떠나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어리고 똑부러지는 소녀인 동시에, 지치고 성숙한 여인인 에밀리는 지금껏 레싱의 글에서 본 그 어떤 여주인공보다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래서 그런 건지도 모르지만, 에밀리를 따라 몇 번쯤 시선을 돌리다보니 이야기는 어느덧 끝이 나있다.

사실 나는 도리스 레싱이 쓴 글을 참 많이 좋아하지만, 그녀가 그 글들을 통해 하려는 말들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 같진 않다. 다만 내 나름의 해석을 하고, 내 나름의 가치를 남겨놓는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차곡차곡 쌓아두다가 문득, 레싱에 대해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좋아하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대상이 있고, 좋아하기 때문에 자꾸만 그에 대해 말하고 싶어지는 대상이 있는데 레싱이라면 확실히 후자라는 기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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