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요즘 내가 읽는 것들, 2009년 7월 본문

피도 눈물도 없이

요즘 내가 읽는 것들, 2009년 7월

dancingufo 2009. 8. 6. 00:52
 

<구입한 책>

안희정, 담금질

닉 혼비 外, 픽션

박찬석 外, 2007 대한민국 유시민을 말한다.

하인리히 뵐, 카탈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위화, 허삼관 매혈기

찰스 디킨스, 데이비드 코터필드1


<읽은 책>

한비야,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유시민, 대한민국 개조론

한비야, 중국 견문록

유시민,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안희정, 담금질

닉 혼비 外, 픽션

스펜서 존슨,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고백하자면, 지금까지 한비야하면 그저 여행가인 줄로만 알았다.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면서 여행 관련된 책을 쓰는 사람인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긴급구호'라는 단체가 뭐하는 곳인지도 몰랐고 한비야가 그 곳에서 일하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한비야라는 이름을 여기저기서 숱하게 들었고, 그가 쓴 책들이 얼마나 잘 팔리는가 하는 것도 익히 알고 있었으면서 이상하게 한비야의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이 사람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채로 몇 년을 보냈는데 지난달 말, 무슨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한비야의 책이 읽고 싶어졌다. 그래서 가장 먼저 고른 것이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였는데 이 책은 바로 한비야가 긴급구호에서 일하면서 본 것, 들은 것, 느낀 것들을 적어둔 책이었다. 


본래 나는 책을 고를 때 출판사 서평이라든가 다른 사람의 리뷰 같은 것을 참고하지 않는다. 때문에 그 책이 어떤 내용의 책인지 전혀 모르는 채로 책을 읽기 시작할 때가 많다. 한비야의 책도 그런 경우로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이 속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서명도 리뷰도 보지 않는다면, 무슨 기준으로 책을 고르냐고 지인이 물은 적이 있다. 그 전까지 나는 사람들이 서명이나 리뷰를 책의 선택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그래서 조금 당황스러웠는데, 덕분에 내가 책을 선택하는 과정이나 방법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해 보았다. 물론, 내가 책을 선택하는 데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작가의 이름이다. 어떤 책을 읽고 그 책이 마음에 들면 그 작가의 책을 마음에 안 들 때까지 읽는 편이다. 그리고 그 작가가 좋아하는 작가라거나, 그 작가가 언급한 적이 있는 작가의 글도 잘 찾아 읽는다. 예를 들면 신경숙이 <외딴 방>에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언급했기 때문에 나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는다. 닉 혼비가 <런던식 책 읽기>에서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여러 차례 언급했기 때문에 나도 이 책을 읽기로 한다. 때로는 도리스 레싱처럼 문학상 수상자이기 때문에 작가를 알게 된 경우도 있다. 노벨상 수상작은 한두 권쯤 챙겨 읽는 편인데 도리스 레싱처럼 모든 작품을 다 찾아 읽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이 작가가 그만큼 마음에 드는 작가라는 뜻이다. 닉 혼비나 알랭 드 보통, 김규항처럼 지인이 이 작가의 책을 추천해 준 덕분에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된 경우도 있다. 이 중 닉 혼비는 정말 대박의 경우다! 고등학생 시절엔 감흥 없이 읽었던 홍세화의 책을 김규항으로 인해 다시 읽게 되기도 한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나 니콜 크라우스처럼 그 해에 굉장히 히트한 작가라서 알게 되기도 한다. 즉 이런 저런 다양한 방법으로 책을 고르는데 대부분은 작가의 이름을 보고 선택한다. 어쨌든 다른 사람의 추천이나 감상에는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데 무엇보다 내가 알지 못하므로 독서 취향이 나와 맞을지 그렇지 않을지 신뢰할 수도 없는 사람들의 리뷰는 나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예외적으로 특별히 신뢰하는 추천자들이 있기도 하지만, 그 수가 그리 많지는 않다.)


한비야는 그다지 필력이 뛰어난 사람은 아니지만 대신 재미있는 이야기꺼리를 가지고 있다. 그 이야기꺼리란 세상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니면서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다. 그녀는 열정적이고, 자기만의 뚜렷한 생각을 가지고 있고, 그 생각대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녀의 책을 읽고 있노라면 덩달아 마음이 뜨거워진다. 나는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 쉽게 감동 받으므로 한비야의 책을 읽으면서도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했다. 내가 편안해지고 부유해진 후에 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는 것. 남을 도우며 사는 이들에겐 자신의 편안함이나 부유함은 첫 번째 가치가 되지 못한다는 것. 그런 것을 다시 깨닫고 생각하고 반성한다. 이런 것을 깨달을 때마다 얼마 알지도 못하는 예수의 말씀을 되새기곤 하는데, 예수가 남긴 말씀 중엔 살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참 많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 모든 말씀들을 잊고 사는 것 같기도 하다.


이라크에서는 몇 백 원의 돈이 없어 아이들의 죽어가고, 케냐에서는 물 한 컵 때문에 살인이 일어난다. 이런 삶이 나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무지해지고 만다. 만약에 무지 때문에 당당해질 수 있다면 마음이 편하겠지만, 나는 이 무지가 부끄럽다. 그래서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 작으나마 누군가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할 수 있는 한 물을 아껴 쓰기로 한다. 한비야의 책을 통해 이런 행동을 하게 된 사람이 비단 나 한 사람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비야는 책을 통해서도 사람을 구조하고 있다.


한비야는 긴급구조 일을 시작할 때, 죽는 것은 두렵지만 이 일을 하면서 죽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 정도의 각오로 어떤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참 부럽고 존경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그런 각오로 일을 한다면 온 진심을 다해 그 일을 해내리라 믿는다. 그러니 한비야가 오랫동안 건강했으면 좋겠고 그래서 좋은 책을 더 많이 썼으면 좋겠고, 그 책 덕분에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돌아보는 사람들이 더더욱 많아졌으면 좋겠다.






다음으로 읽은 책은 <대한민국 개조론>이다. 한동안 유시민의 책을 연속해서 읽었는데, 이러다가는 꿈에도 유시민이 나올 것 같아서 잠깐 다른 쪽에 눈을 주었다. 그리고 다시 <대한민국 개조론>을 읽었는데 결국 유시민이 꿈에 나와서 잠을 깬 후에 조금 웃었다;


<대한민국 개조론>은 세종의 첫째 아들이자 조선의 5대 임금인 문종에게 남명 조식이 바친 상소문으로 시작한다. 유시민이 대한민국의 개조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뜬금없이 조식의 상소문을 빌려온 것은, 이 책 역시 대한민국의 왕들에게 바치는 상소문이기 때문이다.


유시민은 자신의 책을 통해 대한민국의 왕은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그런데 그 왕이 왕의 노릇을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게 문제다. 그래서 유시민은 큰마음 먹고 국민에게 직언이 적힌 상소문을 올린다. 제발 상황을 직시하고, 현명하게 판단하며, 판단에서 끝나지 말고 행동을 하라고 끊임없이 조언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왜 모든 것을 국민 탓으로만 돌리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왜냐하면 유시민의 이야기들은, 국민이 어리석어 어리석은 정치인들이 국회에 판을 치고 그래서 결국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시민의 상소문을 이런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유시민이 직언을 아끼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유시민은 왕이 더욱 현명해지길 바라는 사람이다. 그래서 왕이 귀에 거슬려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바른 소리 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운동권에 있는 동안에도, 정계에 있는 동안에도 늘 소란스럽게 산 사람이니 유시민의 인생사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유시민이 정계에 있으면서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정치인 유시민을 궁금해 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유시민이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던 1년여의 시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이 다소 아쉽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을 통해 정치인으로서의 유시민을 조금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러니 유시민이 펼치고자 했고, 또 실제로 펼쳤던 정책들의 내용이 궁금한 사람들은 이 책을 펼쳐보아도 좋을 것이다. 더불어,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투정만 하기보다는 내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이들 역시 이 책을 흥미롭게 읽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다시 한비야이다. <중국 견문록>은, 읽을까 말까 꽤 많이 고민한 책이다. 나는 2003년과 2004년에 걸쳐 1년 8개월간 중국에서 살았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싶기도 했고 또한 읽기 싫기도 했는데, 한비야의 책을 좀 더 읽고 싶었기 때문에 3권짜리인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보다는 한 권짜리인 <중국 견문록>을 먼저 읽기로 했다.


한비야의 책을 읽다 보면 이런 이야기는 더 재미있게, 또는 더욱 감동적이게 쓸 수도 있을 듯한데 그러지 못했다는 생각이 가끔 든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이 작가의 책을 계속해서 읽어보고 싶은 독자로서 약간의 아쉬움을 표하는 것뿐이다. 나는 한비야 덕분에 반드시 좋은 필력을 가진 사람만이 좋은 책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역시, 훌륭한 문장력을 갖춘 사람이 좋은 책을 쓸 수 있는 가능성은 더 높은 듯하다.


나는 중국에서 사는 동안 그 나라를 별로 즐기지 못했다. 중국어를 열심히 공부했던 것도 아니고 열심히 여행을 다녔던 것도 아니다. 중국인 친구들에게도 별로 관심이 없었다. 나는 그 시간을 그냥 그렇게 흘려보냈다. 그에 비해 한비야의 1년은 매우 보람차 보인다. 역시 한비야는 나보다 한 10배쯤 더 에너지가 넘친다. 


한비야가 중국어를 공부하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있자니 슬쩍 웃음이 났다. 물론 나는 그녀처럼 밤새워가며 열심히 공부해본 적이 없지만, 그럼에도 중국어가 공부하기에 꽤 까다로운 언어라는 것은 알고 있다. 자모 24자만 알면 글을 읽고 쓰는 데는 큰 무리가 없는 한글은, 기본적으로 쓰이는 글자만 3000자에 달하는 한자에 비할 때 엄청나게 배우기 쉽고 사용하기 편리하다. 중국이 경제적으로는 눈부신 발전을 보이면서도 여전히 문맹률이 20%가 넘는 것은 빈부 격차가 심한 탓도 있겠지만 나랏말이 지나치게 어려운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에 비해 대한민국의 문맹률이 거의 0%에 가까워 세계 최저의 문맹 국가임을 자랑할 수 있는 것은 국민들의 뜨거운 학구열과 함께(하지만 중국인들의 학구열도 매우 높은 편이다.) 쉽게 배우고 익힐 수 있는 한글의 편리함 때문이라고 본다.






<중국 견문록>을 끝낸 후에는 다시 유시민의 책으로 돌아왔다. 나는 한 권의 책을 끝내고 다음에 읽을 책을 고르기 위해 책장 앞에 서는 순간이 참 좋다. 책장에 꽂혀 있는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을 둘러보다가 그 때의 내 기분이나 관심사를 고려하여 적당한 책을 선택할 때, 어쩐지 무척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시간을 가지지 않고 바로 다음 책을 집어 들었다. 사실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은 읽어야지 생각을 하면서도 경제 관련 책을 읽기가 싫어서 계속 미뤄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더 미루면 진짜 읽기 싫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결국 용감하게 이 책을 집어 들었다.


다행히도 이 책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었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읽은 유시민의 책은 모두 다 그러했다. 시작할 땐 별로 내키지 않는데도 막상 읽기 시작하면 꽤 술술 읽힌다. 유시민은 글을 참 쉽게 쓰는 사람이다. 다소 난해하거나 사람들이 난해하다고 느끼는 소재를 가지고도 이야기를 쉽게 풀어나간다. 때문에 유시민의 책은 교양서로 읽히기에 적당하다. 그 분야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는 책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을 2/3쯤 읽었을 때, 한동안 독서할 시간을 내지 못해 흐름이 끊어졌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읽기를 선택했는데 그렇게 재차 읽은 탓에 더 재미를 느꼈던 것도 같다.)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유시민이 책을 쉽게 쓰는 이유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한다. 스스로는 부정할지도 모르지만 유시민은 구도자로서의 기질을 가지고 있다. 때로는 국민들이 귀찮아하고 그래서 외면할 수도 있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끊임없이 국민에게 깨어날 것을 권하는 것도 그런 기질 탓일 것이다.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은 아담 스미스부터 고르바초프까지, 시대를 풍미했던 여러 경제학자를 다룬 책이다. 특별한 점이라면 세기의 유명한 경제학자들을 ‘부자의 경제학’을 펼친 이와 ‘빈민의 경제학’을 펼친 이로 나누어 설명한다는 점이다. 물론 유시민이 이들을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구분을 통해서 좀 더 쉽게 경제사를 설명하고 더불어 자본주의가 이점을 가지고 있는 만큼이나 폐해 역시 가지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 책을 통해서 나는 경제가 여러 사회 현상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경제는 단순히 물가라든가 주식, 환율, 수입이나 수출, GNP와 GDP 등의 것들과 세부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도와 정책, 이념 등 한 나라의 전체적인 상황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점들을 조금 더 일찍 깨달았다면 경제라는 분야를 그렇게까지 싫어하진 않았을 것이다.


만약에 경제학과 관련된 책들이 그토록 난해한 공식이나 그래프, 온갖 숫자들로 뒤덮여있지 않았다면 경제를 마냥 어렵고 따분한 것으로만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유시민은 나에게 경제라는 분야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하도록 도와주었고,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이 달 읽은 책 중에서 최고였다고 할 만하다. 그토록 읽기에 꺼려졌는데, 막상 읽은 후에는 그 달 읽은 책 중 가장 재미있었다고 느끼게 되다니. 이것이 바로 책읽기가 가지는 즐거움 중 하나다. 우리는 읽지 않은 채로는 어떤 책에 대해서도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읽지 않고 생각이나 소문만으로 어떠한 책에 말할 수 있겠는가.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을 다 읽을 때쯤, 휴가 계획이 잡혔고 그래서 휴가 때 읽을 책을 정해야겠구나 생각했다. 처음엔 휴가 때는 소설을 한 권 읽자- 라고 마음먹고 있었고 그래서 <픽션>을 구입했는데 구입하는 김에 함께 샀던 <담금질>을 받고 보니 이 책을 어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결국 2박 3일 동안의 휴가를 함께 한 것은 닉 혼비나 조너선 사프란 포어가 아니라 안희정이 되었다.


<담금질>은 안희정이 살아온 간략한 이력이나 살아오는 동안 생각한 것들을 적어놓은 수필집 정도로 보면 된다.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와 노통을 만나고 따르게 된 계기, 2004년 정치 비자금 문제로 옥에 갇혔을 때 쓴 옥중 일기 등이 이 책에 실려 있다.


내 기억 속의 안희정은 늘 올곧고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였다. 그러니까 나는 안희정을 강하고 대쪽 같은 남자로 보아왔다는 뜻이다. 유시민은 자주 울고 눈이 휘어지도록 웃고 화내고 반성하고 비웃고 야단치고 사랑을 고백하는 남자였다. 그래서 유시민은 언제나 데일 듯이 뜨거운 사람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안희정은? 안희정은 대체로 차갑지 않았던가. 안희정은 우는 모습도, 그렇다고 크게 소리 내어가며 웃는 모습도 웬만해서는 보여주지 않는 사람 아니었던가. 


그런데 안희정은 내가 상상하던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온 모양이었다. 안희정이 실은 내가 생각하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 내가 이미지로만 안희정을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 그것을 <담금질>을 읽으면서 새로 알게 되었다.


유시민은 <서른살 사내의 자화상>이라는 글에서 자신이 학창 시절에 매우 냉소적인 학생이었다고 이야기했다. 그것은 내가 상상하던 소년 유시민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라 얼마간 당혹스러움을 느낀 적이 있다. 그런데 소년 안희정 역시 그랬다. 학창 시절의 안희정은 자신감에 넘쳐 있었고, 일련의 영웅 심리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고, 때문에 친구들이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행동을 하면 아무런 망설임이나 죄책감 없이 주먹을 휘둘렀고, 반드시 행동해야 한다는 열정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그래서 안희정은 대학생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대신 고등학교를 중퇴하면서까지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고, 서울대 근처를 누비며 삐라를 뿌리고 다녔던 것이다.


소년 안희정을 알고 나니 그 이후의 안희정이 일관되게 한 길을 걸어온 사람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안희정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특유의 자신감과, 굳은 신념과, 정의를 위해 행동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살아왔다. 이런 것을 알게 된 것이 즐거웠기 때문에, 나는 <담금질>을 읽기 잘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 책이 그렇게 재미난 책은 아니다. 안희정은 유시민처럼 글 솜씨가 좋은 편은 아니다. 안희정은 그냥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열심히 쓰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안희정이라는 개인에게 관심이 있는 이들이 아니라면 이 책을 재미있게 읽기는 힘들 것이다.






그리고 잠깐 뒤로 미루어졌던 <픽션>의 차례다. <픽션>은 닉 혼비, 조너선 사프란 포어 등 요즘 아주 잘 나가는 작가들의 단편 소설을 묶어둔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단편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소설집’ 형태로 된 책은 웬만하면 읽지 않는데 이 책에는 닉 혼비의 글이 실려 있을 뿐 아니라 포어의 글까지 있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도저히 이 책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매우 안타깝게도, 포어의 글은 이미 알고 있는 글이었다. <여섯 번째 마을>라는 이 단편 소설의 두 번째 문단을 읽으면서 나는 ‘어? 어?’하며 몇 번을 멈칫했다. 왜냐하면 나는 포어의 글을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과 <모든 것이 밝혀졌다>밖에 읽지 않았는데(내가 알기로, 이 두 권의 책이 현재까지 포어가 쓴 책의 전부이다.) 이 단편은 분명히 아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체 이 단편을 어디서 읽은 것인가!’하고 엄청 머리를 쥐어짰는데, 그렇게 한 3분을 쥐어짜니 생각이 났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에서 죽은 아빠가 언젠가 오스카에게 들려줬던 이야기였던 것이다. (내 기억이 맞는지 집에 와서 들춰보았는데 실제로 그러했다. 이런 비상한 기억력가트니!)


어쨌든 때문에 나는 포어에게 조금 배신감을 느꼈다. 책의 마지막에야 모습을 드러낼 포어의 글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사실 내가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라니! 이것은 확실히 독자를 맥 빠지게 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포어의 글이 역시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배신감은 배신감대로 두고 애정도 애정대로 두기로 했지만 말이다;)


이 소설집에는 총 7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그 중 최고는 당연히 닉 혼비의 <아주 작은 나라>이다. 이 단편은 (닉 혼비가 쓴 이야기 아니랄까봐) 태어나서 난생 처음, 그것도 어쩔 수 없이 축구를 하게 된 소년이 단 한 경기 만에 그 축구팀의 전술 코치가 되는 이야기이다. 닉 혼비의 글답게 매우 재미있고 유쾌해서 시종일관 웃으면서 읽었다. 역시 닉 혼비는 ‘내 인생을 보다 낫게 해준 인물 best10’ 안에 들어도 나쁘지 않을 만큼 나를 자주 즐겁게 한다. 


닉 혼비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잘 팔리는 작가 중 한 명인 만큼 수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닉 혼비의 글에서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닉 혼비에 열광하는 것을 보고 ‘닉 혼비가 정말로 훌륭한 작가구나!’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물론 닉 혼비는 훌륭하지만 이것은 ‘나에게는’ 그렇다는 말이다.). 그보다는 닉 혼비가 나의 편애 작가 리스트에서 2위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라는 점, 그러니 난 절대로 객관적이지 않게 이 작가의 글들을 읽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런데 만약 나처럼 닉 혼비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과 분명히 보통 이상으로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이 축구를 좋아하고, 한나라당 지지자가 아니라면 10점 만점에 8점까지는 잘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픽션>은 비단 닉 혼비의 단편뿐 아니라 다른 작가의 단편들도 꽤 읽을 만하기 때문에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클로멘트 프로이트(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의 손자라고 한다. 고등학교 때 프로이트를 읽겠다고 이 사람의 책을 내내 손에 들고 다녔던 적이 있는데,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은 이 사람의 손자가 쓴 글을 읽고 있다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졌다.)의 <그림블>도 매우 재미있고, 조지 손더스의 <라스 파프, 겁나 소심한 아버지이자 남편>도 재미있게 읽었다. 기발하고 유쾌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이 책을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이다. 이 책은 이달 내 독서 리스트에 들어 있던 책이 아니다. 살면서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들고 나왔던 책을 출근길에 다 읽어버려 퇴근길에 읽을 책을 사무실에서 찾아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래서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가 사장의 책꽂이에 꽂혀 있는 이 책을 발견하고는 ‘이걸 한 번 읽어볼까?’하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사실 사무실에서 두어 장 넘겨보았더니 이 책은 꽤 구미가 당기는 책이었다. 우연히 발견한 ‘새로운 치즈를 찾아야 한다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다.’라는 문장이 단숨에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제목에서부터 ‘누가 그들의 치즈를 옮겼을까?’라고 묻는다. 하지만 정답은 ‘아무도 옮기지 않았다,’이다. 치즈는 그들이 먹었기 때문에 사라진 것뿐이다. 그리고 어떤 치즈는 이미 상해서 먹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도 그 치즈를 그리워하고 그것이 다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느라 새로운 치즈를 찾으러 나서지 않는 이들의 어리석음에 관한 이야기.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변화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에 관한 이야기가 바로 이 책의 내용이다. 


누군가는 더 이상 남은 치즈가 없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새로운 치즈를 찾으러 나섰지만, 나는 절대로 그런 타입의 인간이 아니다. 이것은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생각지 못했던 불상사가 닥쳤을 때 충격이나 후회, 또는 미련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금세 다시 신발끈을 묶고 달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충격에 사로잡혀 있다가도 결국 다시 일어나 달리게 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얼마나 빨리’ 극복해내느냐 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변화를 두려워한다. 갑작스런 변화는 사람을 당혹스럽게 하고 때로는 절망케 한다. 새로운 치즈를 찾아나서야 한다는 것. 그 생각만으로도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고 지친다. 하지만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면 삶이 훨씬 더 신나고 즐거워질 거라고 이 책은 말한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을 듣고 진실로 그럴지도 모른다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조금 힘이 났다. 갑작스레 회사에 구조적인 변화가 생기면서 이런저런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중에, 우연찮게도 이 책을 읽었다. 이로 인해 내가 완벽하게 다시 힘을 내게 된 건 아니지만, 익숙한 방법 대신 낯설고 새로운 방법이라는 이유만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 정도는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조금 더 어른스럽게 이 상황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그리하여 조금 덜 조급해하고 조금 덜 답답해하고 있으니 가장 좋은 시기에 이 책을 만난 것 같다.






이렇게 때때로 책과의 만남은 사람과의 만남만큼이나(또는 그보다 더) 나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치고 내 인생이 갈 길을 보일 듯 말 듯 바꾸어 놓는다. 때로는 나에게 가장 좋은 방식으로 충고를 하고, 때로는 나에게 가슴 싸한 감동을 주고, 때로는 나에게 삶을 즐겁게 여기게끔 도와주는 것. 그것이 책이라는 것을 이달 다시 깨달았다. 사는 동안 늘 책을 가까이에 둔 채로 지냈지만, 내가 진정 책을 좋아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듯하다. 어린 시절에 책읽기란 그냥 습관이었다. 어떤 시절에 그것은 내가 나 자신에게 부과한 의무였고 그래서 때때로 책읽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책읽기야말로 나를 행복하게 하고 순수하게 웃음 짓게 하고 그래서 계속 살아서 이것을 열심히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런 책 읽기를, 2009년 8월에는 잠깐 뒤로 미뤄두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읽고 싶다. 그래서 다음 달에도 이 글을 쓸 때 이 책이 정말 즐거웠노라고, 나를 웃게 하고 행복하게 했노라고, 이 책을 선택하길 정말 잘했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책을 만나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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