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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가 읽는 것들, 2009년 9월 본문

피도 눈물도 없이

요즘 내가 읽는 것들, 2009년 9월

dancingufo 2009. 10. 2. 23:55
  

<구입한 책>

데이비드 코퍼필드4 - 찰스 디킨스

일의 기쁨과 슬픔 - 알랭 드 보통


<읽은 책>

꽃들에게 희망을 - 트리나 포올러스

사라예보의 첼리스트 -  스티븐 갤러웨이

완득이 - 김려령

우리는 바다를 보러 간다 - 린하이윈

여보, 나 좀 도와줘 - 노무현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 주노 디아스

어른의 학교 - 이윤기

일의 기쁨과 슬픔 - 알랭 드 보통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 하인리히 뵐

상처 입은 봉황 선덕여왕 - 김용희


<꽃들에게 희망을>을 지금에야 읽었다. 누구누구가 추천하고 무슨무슨 필독서이고 하는 이야기를 몇 십번쯤 들은 것 같은데 왜 이제야 갑자기 이 책을 읽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고. 그냥 문득 생각이 나서 읽었다. 잘 읽었고, 좋았고, 힘을 내서 살아야겠다 생각했고, 그래 뭐 그런 거지.


<사라예보의 첼리스트>는 ‘지식인의 서재’에서 신경숙이 추천한 100권의 책 중 한 권이다. 읽을까 말까 고민하던 책인데, 그 리스트에 있는 것을 보고 손에 들었다. 사실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대충은 알고 있었기에, 읽는 도중 마음이 아프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의외로 덤덤하게 읽혔다. 슬프지 않았던 건 아닌데 함부로 울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전쟁을 몸소 겪지 않은 내가 이러한 비극에 대해 ‘알겠다.’거나 ‘이해한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이야기는 저격수 애로, 물을 길러오기 위해 위험한 거리로 나선 케난, 아내와 아들을 다른 나라로 도피시킨 후 혼자 사라예보에 남은 드라간, 그리고 박격 포탄에 목숨을 잃은 스물 두 명의 사람들을 위해 22일간 거리에서 첼로를 연주하기로 한 첼리스트를 보여준다. 그 중에서 드라간의 이야기는 특별히 마음을 안타깝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가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마주치기 때문이다. 자신은 절망했는데 여전히 희망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그 속에서 드라간이 절망을 놓고 희망을 가지기로 했는지, 아니면 계속해서 절망에 빠져있는 나로서는 알 수 없다. 그저, 만약 드라간이 잃었던 희망을 되찾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인간에게는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할 뿐이다.


<완득이>는 작년에 출간되어 마해송 문학상과 문학 동네 어린이 문학상, 창비 청소년 문학상을 석권한 작품이다. 당연히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쩌다보니 지금까지 미뤄두었다. 그렇게 일 년을 넘게 지나 읽었는데, 아주 좋았고 또 음- 아주 괜찮았다.


‘성장’이라는 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두이다.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든, 어른이 진정한 자신으로 성장하든, 나는 누군가가 성장하는 이야기가 좋다. 완득이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고, 여자친구를 만나고, 엄마를 찾고, 선생님의 진심을 조금씩 마음으로 느끼는 이러한 성장 이야기는 봐도 봐도 질리지 않고 판에 박혔다거나 그래서 식상하다는 생각 역시 들지 않는다.

 

다음으로 읽은 린하윈의 <우리는 바다를 보러 간다> 역시 성장 이야기라 볼 수 있다. 지난달에 읽었던 <아버지의 꽃은 지고 나는 이제 어린애가 아니다>와 함께 <<북경 이야기>>에 속하는 작품으로 이 책이 1권이다. <아버지의……>가 꽤 마음에 들어서 일부러 찾아 읽은 것인데 역시나, 역시나! 비록 제목은 <아버지의 꽃은 지고 나는 이제 어린애가 아니다>만큼 가슴 두근거리지 않지만, 그 내용 만큼은 2권에 절대 뒤지지 않는다. (어느 쪽이 더 좋았냐고 묻는다면, 고민을 좀 한 끝에 1권이라고 말하겠다.)


이 책은 친구 뉴얼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바다를 보러 가기로 했던 한 청년과의 추억이 담긴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 번째보다는 두 번째 이야기가 더 오래 가슴에 남는다. 이 이야기는 그러니까 이런 기분을 남긴다. 부드럽고 낭만적이지만 따뜻하기보다는 서늘한 기분. 지난달에도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이 이야기들은 아름답지만 슬프고 안타깝지만 낭만적이다. 이런 기분을 가지게끔 하는 글, 그런 글을 쓰려면 마음 한 쪽에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감성을 품고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도 든다.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다 읽은 책인데(그다지 길지 않은 책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다 읽고 나서 바로 뭔가 메모를 남겨 두고 싶은 그런 책이었다. 동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읽어봐도 좋을 것이다.


다음으로 드디어, <여보, 나 좀 도와줘>를 읽었다. 노통께서 그렇게 돌아가시고 이 책을 산 후에 바로 읽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런데 어쩐지 쉬이 그럴 수가 없어서 유시민의 책들만 차례대로 모두 읽고 그리고 한동안 쉬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마음이 괜찮아졌다는 생각이 들어서 손에 들었다. 다행히도, 보는 동안 울고 싶진 않았는데 조금 그리운 마음이 들긴 했다.


노무현. 아주 특별했지만 실은 보통의 대한민국 사람들과 그다지 다를 것이 없던 노무현. 기분 좋은 일이 있으면 슬쩍 자기 자랑을 하기도 하고, 부끄러워하면서도 자신의 부족했던 과거를 고백하고, 빈곤이나 차별 또는 억압이나 관계맺음에서 오는 다툼들 앞에서 솔직하게 괴로움을 토로하기도 하는 사람. 노통께서 1994년에 썼다는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그가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사람처럼 보인다. 실제로 노무현은 소박한 사람이고 그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도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그가 특별한 것이 있다면, 어렵거나 힘들어도 자신의 상식에 기초하여 행동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럴 수 없기 때문에, 결국 노무현은 특별한 사람이고 또한 가장 특별한 정치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우리처럼 결점을 지닌 보통 인간이라는 것, 그럼에도 그가 ‘정직함’이나 ‘원칙’에 위배되는 일 앞에서 언제나 당당하게 반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 힘이나 권력 앞에서 물러나거나 무릎 꿇지 않았다는 것, 그러한 것들 때문에 노통을 좋아한다. 그는 내가 배우고 싶은 점을 온몸으로 보여준 사람이고, 또한 내가 나의 상대에게 원하는 것을 아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아무것도 못하고 잃었다는 것. 잃은 후에야 그 가치를 다시 생각했다는 것. 그게 나는 아프고 부끄럽다. 내가 노통에 관한 것들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이유는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럼에도 모른 체 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걸 안다. 다시는 모르기 때문에 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노무현의 정신을 우리가 잊지 않고 이어나간다면, 대한민국은 조금 더 소중하고 진실하며 고귀한 가치를 좇는 나라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느낌표 세 개인 것 보이시나? 그래, 이 책이 이 달의 주인공이다. 이 책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내 마음에 쏙 드는 이 달의 주인공이다.


나는 이 이야기가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몇 장 넘기자마자 이 이야기에 빠져 들어서 눈을 뗄 수도 없었고 마음을 뗄 수도 없었다. 단번에 읽고자 마음먹어서가 아니라 정말 눈과 마음을 떼기가 힘들어서 밤잠 안 자가며 읽었다.


이것은 도미니카계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난 오스카 와오와 그의 누나, 그의 어머니, 그의 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 가족에 관한 이야기로 매우 사적인 이야기지만, 동시에 트루히요라는 독재자 밑에서 신음했던 도미니카라는 한 국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매우 개인적인 동시에 매우 국가적인 이 이야기는 매우 재치있고 기발하며 유머러스한 동시에 슬프고 안타깝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수십 번쯤 웃었고 한 번 울 뻔 했으며 아주 살짝이긴 했지만 한 번은 실제로 울었다.) 이 책은 화자(이 이야기의 화자는 주인공 오스카의 누나인 롤라의 남자친구였던 유니오르이다.)는 어딘가 모르게 삐딱하면서도 따뜻하고 낭만적으로 여겨지는 시선을 가지고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니까 이 책은 개인적이고 사회적이며, 재미있고 슬프며, 삐딱하지만 따뜻하고, 재치와 기발함을 갖추었지만 운명론적인 이야기인 것이다. 하나의 이야기가 이렇게나 다양한 수식어와 잘 어울리기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주노 디아스는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을 통해 그 일이 불가능한 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정말이지 이 소설은 이야기가 가질 수 있는 아주 많은 덕목들을 갖추고 있다. 아주 노력하고 노력해서 이 책이 빠뜨린 덕목을 굳이 찾아내자면 그것은 ‘우아함’ 정도일 것이다.


주노 디아스가 첫 단편 소설집이었던 <Down>을 발표한 이후 이 책을 내기까지 11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책을 보기 위해서라면 11년의 기다림도 아깝지 않다는 평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다음 책을 보기 위해서 11년까지 다시 기다리게 되는 건 싫다. 아주 좋은 책을 써냈다. 그러니 오래지 않아, 다시 또 좋은 책으로 주노 디아스를 만나게 되기를.


그 다음으로 읽은 책은 번역가 이윤기의 수필집인 <어른의 학교>이다. <장미의 이름>과 <그리스인 조르바>를 이윤기 덕에 읽었으니 (꼭 이윤기만의 덕은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웬만큼 괜찮은 번역가가 아니라면 <장미의 이름>을 번역하긴 매우 힘들었을 것이므로 이윤기의 존재를 고마워해야 하는 건 맞을 듯하다.) <어른의 학교>를 한 권쯤 사서 읽는 것도 좋을 듯했다. 그래서 몇 달 전에 사두고 이번에 읽은 것인데, 충분히 여러 가지 생각을 해가며 읽을만한 책이었는데 먼저 읽은 책의 느낌(감동이나 충격 뭐 그런 것)이 너무 강해서 쉽게 이 책으로 넘어올 수가 없었다. 매우 마음에 드는 책을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지만, 그 느낌 때문에 다음 책을 읽는 데 방해를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인 듯하다.

 

그리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길에는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를 가지고 갔다. 이 책은 유시민이 강연 도중 추천했던 작품이다. 이 작품을 추천했던 것 보면, 그때 아마도 미디어법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나보다. 미디어법과 이 작품이 어째서 연관성이 있느냐 하면, 이 이야기가 바로 언론의 폐해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뵐은 이 작품을 두고 ‘소설’이라 하지 않고 ‘이야기’라 부른다. 어쩌면 뵐은 이 작품이 ‘허구’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이야기꾼과 소설가의 차이를 밝혔던 발터 벤야민에 따르면, 소설은 가공된 허구이지만 이야기는 화자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고 한다.) 


게다가 뵐은 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독자들에게 한 가지 말을 먼저 던진다. 책의 첫 장에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은 자유로이 꾸며 낸 것이다. 저널리즘의 실제 묘사 중에 <빌트>지와의 유사점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의도한 바도 우연의 산물도 아닌 그저 불가피한 일일 뿐이다.”


라고 밝힌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역설적인 동시에 통쾌한 발언인지. 언론의 폐해에 대해 얘기하려면 의도하지 않아도, 또는 우연이 발생하지 않아도, 그 언론의 모습이 <빌트>지와 닮을 수밖에 없을 만큼 <빌트>지는 부도덕한 신문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닌가.


이 책을 추천하며 유시민이 하고 싶었던 말도 뵐이 하고자 했던 말과 비슷했을 것이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신문인 <차이퉁>지는 뵐이 살던 당시 독일에서 구독률 1위를 자랑했던 <빌트>지와 닮았으며 동시에 우리나라에서 구독률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어떤 신문과도 닮았다. 그래서 유시민은 우리에게 이 책을 읽길 권했고, 언론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치는지, 그러한 언론이 진실하지 못하거나 권력과 연계되어 있을 경우 우리들의 삶은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들고 내려간 책을 가는 길에 거의 다 읽어버려서 결국 고향에서는 언니의 책을 빌려 읽었다. 무슨 책을 읽을까,고민하다가 요즘 한창 인기 중인 선덕여왕에 관한 책을 골랐다. 엄마도 언니도 드라마 ‘선덕여왕’을 너무 재미있게 보고 있기에, 옆에서 한 회를 같이 보다가 저건 대체 어디까지가 역사를 비틀어 놓은 것인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그래서 읽게 된 <상처 칩은 봉황 선덕여왕>. 재미있었다거나 책이 좋았다거나 할 것은 없고, 그냥 난 선덕여왕이 조금 더 나이가 들어서 여왕이 된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비담의 난'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어쨌든 역사라는 것은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이 읽고 많이 보고 많이 생각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 달의 마지막 책은 알랭 드 보통의 <일의 기쁨과 슬픔>이다. 사실 고향에 내려가기 전에 읽던 책인데, 내려갈 때 짐이 무거워 빼놓고 갔다. (표지가 하드커버로 되어 있어 책이 무겁다. 정말이지 난 두꺼운 책들은 웬만하면 페이퍼북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하여, 고향에 다녀와서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소설이 아니라 이야기의 흐름이 끊겨도 별다른 불편은 없었다.


<일의 기쁨과 슬픔>은 제목 그대로 일에 관한 이야기이다. 알랭 드 보통은 인간이 사랑에 빠지고 가족과 싸우고 때로는 누군가를 죽이지만, 그것보다도 진짜 하고 있는 것은 ‘일’이라고 말한다. 그런데도 일에 관한 예술은 좀처럼 보기 드물기 때문에 일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나 뭐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일에 관한 이야기는 그다지 재미있지 않다. 매일매일 일을 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예술에서마저 일을 만나기는 싫은 이유인지도 모른다. 알랭 드 보통은 일의 ‘기쁨’과 ‘슬픔’이라고 했지만 사실 일이 주는 것은 약간의 즐거움과 대부분의 일상을 피곤하게 만드는 괴로움이다. 나는 내 일을 그럭저럭 잘해내고 있고, 내 일에 관해 어느 정도의 전문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고, 내 일을 그다지 싫어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할 때 종종 괴로움을 느낀다.


비스킷 공장, 물류 사업, 화가 등 알랭 드 보통은 이 책에서 총 열 가지의 일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직업 상담에 관한 이야기와 (의외로) 송전 공학에 관한 이야기다. 일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 중에 직업 상담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한다는 것은 어쩐지 매우 아이러니하게 느껴졌고, 하여 더 흥미로웠다.


먼저 직업 상담에 대해. 우리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또는 스무 살을 조금 지나서 철없이 선택한 일을 평생 동안 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땐 꽤나 끔찍했다. (그런데 나는 잠깐 하고 말려던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으니 일을 하면서 괴로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각자에게 맞는 직업을 찾아내주는 사람들을 보며, 나에게도 그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나는 원하는 것과 하고 있는 것과 앞으로 할 일을 전부 다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는 동시에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갈피를 못 잡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송전 공학에 대해. 살면서 송전탑을 제대로 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사실 누군들 그러하겠는가.) 이 파트를 읽으며 이런 일을 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했다. 제목만 보고서는 아주 지루한 파트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이 부분을 읽는 동안 마음이 참 편했다. 인적 드문 길을 송전탑을 바라보며 걷는 시간. 그것은 남들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일이다. 그래서 왠지 특별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특별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 것 같다. 앞으로도 나는 송전탑 같은 것엔 눈길을 주지 않고 살겠지만, 세상엔 그런 것에서 아름다움이나 균형감, 또는 섹시함까지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은 잊지 못할 것이다.


자, 이렇게 9월도 끝이다. 10월엔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읽은 후에, 다시 잠깐 비소설로 돌아갈 계획이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독서 속도가 느려지겠지만, 읽어야 할 책이 많다. 그것이 주는 것은 즐거운 피로감이다. 그저 바라는 것이 있다면 9월에 그러했던 것처럼 10월에도 마음에 쏙 드는 책을 만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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