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2009년 10월 11일, 본문

아무도 모른다/2009.01 ~ 2009.12

2009년 10월 11일,

dancingufo 2009. 10. 12. 03:19

우연히 하드를 뒤지다가 알았다. 내 하드 속에는, 99년부터의 김은중 영상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는 걸. 지금은 서른이 넘은 김은중이다. 그 김은중이 채 스물이 되기 전에 이동국과 아시아를 제패하던 시절의 경기 영상이 나에게 있다. 01년에 FA컵 우승컵을 들던 김은중의 영상도 있고, 01년에 포르투갈로 전지훈련을 떠났던 이관우의 영상도 있고, 02년에 울산에게 세 골을 내리넣으며 FA컵 결승전에 오르던 영상도 있으며, 한 경기만 더 이기면 2년 연속 FA컵을 손에 쥐는 거라며 욕심을 드러내던 김은중의 인터뷰 영상도 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대전 시티즌을 사랑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의 대전 시티즌을 가장 사랑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게 만드는 03년의 대전 영상들. 그 시절의 대전 시티즌 경기가, 골 영상 하나하나가, 인터뷰 하나하나가 어쩌면 이렇게도 나를 설레게 하는지. 퍼플 아레나에서 몸을 푸는 김은중. 이관우, 김영근, 강정훈과 둘러앉아 수다를 떠는 김은중. 멋진 패스를 넣어준 주승진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김은중. 골을 넣고 벤치로 달려가 감독님을 찾는 김은중. 그 시절의 수많은 김은중이 꼭꼭 하드 속에 숨어 있다가 문득 이렇게 짠- 하고 나타나 나를 웃게 만든다.

2003년 8월, J리그로 떠나기 전 마지막 고별 영상이 있고 그리고 2002년 8월 30일, 센다이에서의 데뷔전에서 골을 기록하던 영상이 있다. 센다이 입단 전에 입단 테스트를 받는 영상도 있고 03년 올스타전 영상이 고스란히, 그리고 다시 K리그로 돌아와 다른 팀의 유니폼을 입고 뛰는 영상도 하나하나. 이렇게나 많은 영상이 여전히 나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조금 놀랐고, 그 영상들을 몇 가지 돌려보다가 내가 그 시절의 대전 시티즌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새삼 다시 깨달았다. 그리고 그리고 말이지.

나는 그 시절에 김은중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김은중이 뛰는 것. 김은중이 골을 넣는 것. 김은중이 넘어지거나 다시 일어서거나 화를 내거나 웃거나 소리를 치고 손을 번쩍 들고 하이파이브를 하고 어슬렁어슬렁 걷고 두 팔과 두 다리를 벌린 채 아레나의 잔디에 눕고 재잘재잘 쉼없이 수다를 떨고 불만 많은 소년처럼 입을 쑥 내민 채 인터뷰를 하고 웃는 듯 웃지 않는 듯 모르게 웃고 보는 듯 보지 않는 듯 흘끗흘끗 보고

그리고 눈쌓인 숙소 앞 내리막길에서 썰매를 탔다던, 야구공도 글러브도 손에 없으면서 혼자 서서 공 던지는 연습을 하던, 수많은 노래를 틀고 좋은 노래는 팀 선수들에게 구워주기도 해서 팀의 DJ로 불리던, 그 시절의 김은중.

김은중방은 건강방이라 불리던 시절의, 군것질 좋아하는 6인방이 몰려다니던 시절의, 최고참이면서 여전히 막내라 궂은 일 알아서 도맡아하던 때의, 빽빽하게 날이 선 눈빛을 하고서도 참 따뜻하고 정겹고 때로는 무척이나 귀여워 저런 사람이 어떻게 그라운드에서는 그토록 철저하게 믿음직스러운지 믿기지 않곤 하던 때의,

그 때의 김은중. 내가 가장 사랑하던 시절의 김은중. 지금도 여전히 아주 좋아하지만, 늘 변함없이 내게는 최고의 선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장 사랑했던 김은중은, 대전 시티즌 유니폼을 입고 있던 김은중. 내가 가장 사랑했던 대전 시티즌은 김은중이 있던 때의 대전 시티즌.

그래서 너무 그리워지고 말았다. 오늘은 인천에게 지고 돌아오면서, 3주 내내 일요일마다 대전이 지는 것만 보고 있다며 자학을 하면서도, 고창현이 골을 넣고 권집이 90분 내내 컨디션이 좋아보였다는 것만으로도 패배 따윈 잊고서 기분 좋아했는데, 그런 나를 보며 나에게 대전 시티즌이 여전히 참 좋은 존재라는 걸 알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 전의 그 대전 시티즌은 나에게 얼마나 소중하고 얼마나 가슴 두근거리는 존재였는지.

돌아갈 수 없다는 건 알지만, 만약에 김은중이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대전 시티즌의 유니폼을 입어준다면. 정말로 만약에 단 6개월이라도 그런 일이 일어나만 준다면. 만약에 김은중이 대전 시티즌에서 은퇴를 해준다면. 그렇다면, 정말로 만약에, 아주 만약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축구팬으로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내가 축구팬으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이 아닐까. 그래, 그런 생각을 해버렸다. 이런 건 꿈도 꾸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런 꿈을 꾸고 말았다. 

강팀이 되는 것도 우승컵을 차지하는 것도 바라지 않을 테니, 우리에게 딱 한 번만 더 김은중과 이관우를 돌려줄 수는 없는 걸까. 그 사람들과 우리가 다시 '우리'가 되는 건 영영 불가능한 걸까. 우리들이 '우리'가 되지 못하고 하여 툭하면 상대팀으로 만난 게 벌써 몇 년째의 일인데 아직도 이렇게 이런 꿈을 꾸다니, 미련은 참 질기고도 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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