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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328] 광주 vs 제주, 혼자서 축구장을 간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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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328] 광주 vs 제주, 혼자서 축구장을 간다.

dancingufo 2010. 4. 1. 11:22

 

01. 혼자서 축구장을 간다.

 

오늘은 혼자서 축구장을 간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지인들과 함께 대전을 가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루 전에 계획을 바꾸었다. 덕분에 나는 동행을 구하지 못한 채 혼자서 광주행 버스를 탄다.  예전에도 곧잘 혼자서 축구를 보러 다녔지만, 이렇게 먼 곳까지 혼자 가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하여 책과 MP3와 메모지와 펜 등, 나의 심심함을 달래줄 것들을 잔뜩 가방 안에 집어 넣고 나는 오늘 혼자서 축구장을 간다. 

 

 

02. 다시, 광주 월드컵 경기장

 

광주 월드컵 경기장에는 5년 전에 한 번 가본 적이 있다. 당시 나는 보름 후면 이 나라를 떠나기로 되어 있었고, 때문에 그 전에 K리그 경기를 한 경기라도 더 봐두고 싶은 마음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 내 마음을 이해해준 친구가 (자신은 부산팬임에도 불구하고) 광주까지 경기를 함께 보러 가주겠다고 하여, 둘이서 광주 상무와 전북 현대의 경기를 보러 갔다.

 

그때 그 경기에서는 무려 다섯 골이나 터졋고, 전북이 펠레 스코어인 3대 2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동국이 두 골을 몰아넣으며 그곳까지 저의 경기를 보러 온 우리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 경기를 제대로 즐기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광주 경기장의 열악한 시야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퍼플 아레나의 기막힌 시야에만 익숙해져 있던 터라 광주 월드컵 경기장은 '도저히 축구를 제대로 볼 수 없는 곳'으로 느껴졌다. 하여, 광주를 떠나면서 '내가 여기 축구를 다시 보러 오나 봐라!'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 나는 혼자, 축구를 보기 위해 다시 그곳에 간다.

 

고속 버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3시간 20분쯤 달리니 광주 터미널에 도착, 그곳에서 다시 26번 버스를 타고 15분쯤 달리니 광주 월드컵 경기장이 나타난다. W석으로 들어가기 위해 N석을 지나쳐 경기장의 절반을 돌았는데도 입구가 나타나지 않아 대체 어떻게 된 건가 살펴보니, 들어가는 곳은 N석의 입구뿐인 듯하다. 그곳으로 들어가면 경기장 안에서 W석으로 옮겨가는 것이 가능한 모양. 괜히 밖에서 빙빙 돌았네- 생각하며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니, 아니나다를까. 관중석에는 사람이 많지 않다.

 

다들 알겠지만, 광주는 시민구단창단을 약속해놓고 이를 지키지 않은 문제로 하여 2008년을 끝으로 서포터들이 응원을 중단하였다. 게다가 제주는 연고이전구단이다 보니 (그리고 제주라는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원정 응원 자체가 힘들다보니) 응원석에 설 서포터들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하여 W석과 E석에만 간간히 관중들이 앉아있는데 다 합해 천명이나 되려나 싶다. 그런데 나중에 관중 집계를 보니 2532명이나 들었다고 한다. 관중 집계를 보면서 자주 하는 생각이지만, 그 많은 사람들은 대체 다 어디에 숨어 있는 건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렇게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사람들 속에 자리를 잡고 앉아 경기가 시작되길 기다린다. 내려오는 버스 안에서도, 광주 시내 버스 속에서도 햇볕이 너무 좋아 괜히 날씨 걱정을 했구나 싶었는데 늘 그렇듯이 축구장 안에 앉아있노라면 추위가 급습을 한다. 그라운드 반쪽에는 눈부시게 태양이 내려앉아 잔디가 반짝반짝하는데, 지붕을 어찌나 절묘하게 만들어 놓았는지 관중석에는 햇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아 공기가 서늘하다. 나도 햇볕 아래 있고 싶지만 그렇다고 경기장 난입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어쩔 수 없이 목도리를 꺼내 무릎 담요 삼고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고는 잔뜩 어깨를 움츠린 채 경기가 시작되길 기다린다.

 

 

03. 간질간질한 기분

 

주장 완장을 차고 가장 먼저 그라운드로 들어서는 이는 김은중이다. 관중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곧 심판들 앞으로 가 공격 방향을 결정 짓는 김은중을 보고 있자니, 나는 어쩐지 간질간질한 기분이 되고 만다.

 

나는, 김은중이 팀에서 가장 어린 선수였던 시절부터를 기억한다. 그때도 김은중은 어리기 때문에 가지게 되는 미숙함이나 무모함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지금처럼 든든해 보이는 맏형의 이미지 또한 아니었다. 묵묵히 저 할 일을 다 하는 선수긴 했지만, 슈팅이 빗나가 아쉬워하는 후배에게 다가가 그 어깨를 짚어주는 선수 또한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제법 맏형의 역할이 어울리는 사람으로 변했다. 동료들을 격려하고 다독이는 모습이 나름대로 잘 어울려 얼마쯤 신기하고, 얼마쯤 낯설고, 얼마쯤 재미있다. 그래서 그런 여러 가지 마음에 사로잡혀 있다가 결국 간질간질한 기분이 되고 만다.

 

오랜만에 깨닫는 것이지만, 김은중은 여전히 나를 즐겁게 하는 선수다. 중국에 진출해 있는 동안, 그 경기를 보지 못해 아쉬웠는데 다시 이렇게 달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새삼 즐겁다.

 

 

04. 비록 골은 없었지만

 

전반전도 후반전도 득점 없이 0:0으로 끝나긴 했지만, 경기는 꽤 재미있다. 제주는 김은중을 원톱으로 내세우고 그 밑을 이상협과 네코, 김영신에게 맡긴다. 주로 제주가 공격을 주도하지만, 이를 막는 광주의 수비도 생각보다 견고하다. 김영삼, 배효성, 장현규, 최원권의 포백은 최근 펄펄 난다는 이상협을 꽁꽁 묶어놓기에 충분하다. 사실 요즘의 이상협이 어떤 폼을 보여주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조금 아쉽다.

 

김은중을 따라다니는 장현규는 여전히 침착하고 빠르다. 대전에 있던 시절, 특별히 아끼던 선수라 그런 걸까. 팀을 떠난 지 벌써 4년째건만 여전히 장현규는 우리팀 선수같다. 김정우가 지키고 선 중원도 구자철이나 오승범에게 밀리지 않는다. 최근 들어 제주가 상승세에 있는 데다 광주에서는 최성국도 결장한다기에 은근 제주의 승리를 점쳤건만, 경기를 지켜보고 있자니 제주가 승리를 챙기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후반 15분, 박경훈 감독은 네코를 내보내고 대신 배기종을 투입한다. 개막 직전, 발목을 다쳐 내내 경기를 못 뛰었으니 이것은 배기종의 복귀 경기다. 그 동안에도 제주는 순항을 하고 있었으므로 복귀를 한다해도 몸 상태를 확인하는 정도에서 그칠 거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배기종의 투입은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이루어졌고, 그것이 승리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제주의 공격이 좀 더 다양하게 펼쳐지겠구나- 하고 예상하게 만든다.

 

들어오자마자 날카로운 패스를 두어번 연달아 보이기에, 감각이 죽지 않고 살아있구나 싶다. 그렇지만 막상 동료가 보내주는 패스는 놓치는 경우가 잦아 아직까지는 손발이 맞지 않아 보인다. 경기 종반으로 치닫자 김은중과 배기종의 움직임이 종종 겹치기도 한다. 결국 김은중이 밑으로 내려오고 다른 공격수(정확하게 이름을 확인하지 못했다. 이상협과 교체된 선수로 보였으니, 아마도 양세근)를 최전방으로 올려보내고 배기종은 오른쪽 측면을 담당한다. 역할 분담이 이루어지면서 공격이 활기를 찾는가 싶었고 배기종에게서 괜찮은 슈팅이 두어번 연달아 나오기도 했는데 (이 날의 배기종은 쉬다 나온 탓인지, 뭔가 보여주어야겠다는 생각이 강해보인다. 부담 없이 경기를 했다면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을까 싶다.) 아쉽게도 골로 이어지진 않는다. 결국 제주는 단 하나의 유효 슈팅만을 기록하며 올 시즌 처음으로 0점 경기를 한다.

 

축구 경기의 꽃은 당연히 골이 터지는 순간이니, 그 장면을 보지 못하면 조금 맥이 빠진다. 하지만 나는 90분 내내 집중력을 유지하며 경기를 지켜본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사실 이제는 K리그 경기를 꽤 오래 봐왔다고 말할 수 있는 만큼, 0점 경기 같은 것이야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다.

 

 

05. 이번엔 광주 공항

 

경기장에서 어찌나 떨었던지 조금만 더 그 자리에 있으면 꽁꽁 얼어버릴 것 같아 경기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경기장을 빠져 나온다. 내려올 땐 고속 버스를 탔는데, 오는 동안에는 모르겠더니 내리고 나자 속이 좋지 않다. 그래서 올라갈 땐 버스를 못 타겠다 싶어 '시간이 돈이다, 체력이 돈이다.' 생각하면서 공항을 찾는다. 공항을 찾아가다 시내를 헤매게 될까봐, 경기 전에 미리 친구에게 (5년 전에 나와 함께 광주를 찾아주었던 그 친구!) 광주 공항 가는 방법을 검색해 달라고 부탁해 두었는데, 경기장 앞에 있는 버스 정류장을 가보니 한 번에 공항까지 가는 버스가 있다. (아마도 20버 버스.) 그 버스를 타고 한 20분 달리니 공항역이다. 내려서 7~8분 걸으면 된다기에 터덜터덜 걷고 있는데, 커다란 버스 한 대가 나를 지나쳐 공항으로 휙 들어간다. 뭔가 싶어 보니, 바로 제주 선수단 버스이다. 난 경기가 끝나자마자 바로 나와 버스를 타고 온 것인데, 선수들은 씻고 옷도 갈아입고 하였을 텐데도 나보다 빠르다.

 

 

06. 참으로 바쁜 하루

 

공항으로 들어가 보니, 광주 공항은 손바닥만 하다. 그 작은 곳에 축구팬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다. 그러니 마음만 먹으면 선수들 구경을 실컷 해도 좋을 상황이건만, 내 상황은 그렇게 여유롭지가 않다. 비행기표를 예매해두지 않았으므로, 이대로 서울로 올라갈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는 남은 좌석 수가 0으로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어쨌든 공항까지 가보면 무슨 방법이든 생길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대한항공 쪽으로 가 문의해보니 안타깝게도 대기를 걸어두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한다. 게다가 6시 40분에 떠나는 그 비행기가 그 날의 마지막 비행이라니. 얼른 대기자 명단을 찾아 이름을 쓰긴 했는데 내 번호는 무려 20번이다. 19명이나 취소를 해야 비행기를 탈 수 있는 상황이라니, 일단은 한숨부터 나온다.

 

그래도 그냥 손을 놓고 있으면 안 될 듯하여 옆에 있는 아시아나 쪽으로 가 그쪽도 대기를 걸어둔다. 다행히도 이쪽은 대기자 5번. 비록 비행기 시간이 7시 20분이긴 하지만, 다시 기차역으로 가 기차 시간을 맞출 바에야 기다렸다가 이쪽에서 비행기를 타는 게 낫다. 그래서 커피나 한 잔 하며 기다리잔 생각에 2층으로 올라가니, 식당가일 줄 알았던 2층엔 식당이 딱 하나밖에 없고 (그 식당 안에서는 제주 선수들이 식사 중이다. 흘끗 보니 눈에 띄는 이는 김은중과 박경훈 감독이다. 김은중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나는 박감독님을 잘 모르는데, 그 분이 왜 그렇게 한 눈에 띄는 건지 모르겠다;) 커피숍도 테이크 아웃 커피숍 밖에 없다. 거기서 커피를 한 잔 살까 하다가 어쩐지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아 그냥 의자에 앉아서 시간이 가길 기다린다. 그리고 6시 15분, 부디 40분 비행기를 탈 수 있길 바라며 (7시 20분까지 기다리다가는 졸아버릴 것 같다. 게다가 나는 대한항공 마일리지를 모은단 말이지!) 1층으로 다시 내려가보니 나처럼 표를 못 구한 대기자들이 잔뜩 한 창구 앞에 모여있다. 그 사이를 밀치고 들어가 몇 번까지 표가 나오나 지켜보니 오오~ 21번까지 표가 나왔다! 기뻐서 잠깐 환호를 지를 뻔도 했지만, 간신히 참고 서둘러 표를 끊는다. 그리고 날듯이 움직여 비행기에 탑승하니 6시 30분. 곧 비행기가 이륙한다. 다행스럽게도 무사히 서울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참으로, 바쁜 하루의 일정이다.

 

 

07. 즐겁게 축구를 보는 것

 

김포에 내려 집까지 오니 아홉시가 조금 넘어 있다. 아침 7시에 일어나 하루종일 부산을 떨었으니, 피곤할 만도 하다. 그런데 그 피곤이 불쾌하지 않은 것 보니, 나름대로 즐겁긴 했던가 보다. 사실 언제부턴가 축구를 좀 습관적으로 보고 있는데, 오늘은 오랜만에 '축구가 참 재미있구나.' 생각했다. 일주일에 엿새를 일하고 하루를 쉬는데 그 하루를 축구장을 찾아다니는 데 쓰는 것은 때때로 나를 지나치게 바쁜 사람으로 만든다. 그래도 이렇게 즐겁게 축구를 보고 나니 어쩐지 사는 일이 좀 더 활기차진다. 다음의 축구도 이렇게 즐겁게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문득 깨달은 것인데, 즐겁게 축구를 보는 것이 나에겐 아주 큰 에너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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