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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501] 대전 vs 인천,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분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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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501] 대전 vs 인천,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분다.

dancingufo 2010. 5. 2. 03:55

 

YF소나타를 준다는 이벤트 때문인지, 아니면 청소년 대동 시 입장료의 얼마를 할인해준다는 할인권 탓인지, 5월 1일 퍼플 아레나에는 평소보다 4~5배 많은 관중이 몰려들었다. 덕분에 경기장으로 향하는 도로에서부터 차가 막혀 평소 같으면 10분 만에 갈 거리를 50분 걸려서 갔다. 다행히 킥 오프 전에 경기장에 도착하긴 했는데 차에서 내리고 보니 매표소 앞에 사람이 한 가득, 겨우겨우 표를 산다고 해도 출입구 앞에 또 사람이 한 가득이다. 결국 경기가 25분이나 지난 후에 경기장 안으로 들어서니, 아니나 다를까. 이미 1층엔 사람들이 빼곡히 차 앉을 자리를 찾을 수가 없다.


자리를 찾아 움직이기 시작하면 전반전이 다 끝날 것 같아 결국 전반은 선 채로 보고 하프 타임 때 움직이기로 한다. 하지만 2층으로 올라가보아도 사람이 많기는 매한가지. 어쩔 수 없이 가장 꼭대기 층의 한 모퉁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경기를 보고 있자니, 문득 견딜 수 없이 짜증이 치민다.


이벤트니 할인권이니 하는 그런 것들이 다 뭐란 말인가. 그런 것들에 혹해 경기장을 찾은 사람들 때문에 어째서 내가 꼭대기 한 구석에서 경기를 봐야 하는 것이지?


지난 9년 동안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상관 않고 경기장을 찾은 것은 나이다. 나는 팀이 플레이오프에 나갈 때나 꼴찌를 할 때나 상관없이 경기를 봐왔다. 그런데 하프타임이 지나면 양 팀의 골대 위치가 바뀐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들 때문에 왜 내가 고창현의 플레이를 멀리서 봐야 하는 거냐는 말이다. 그 사람들이 대전 시티즌의 무엇인데? 어차피 그 사람들에겐 박성호가 PK를 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문제가 내일 아침에 뭘 먹는가 하는 문제보다도 덜 중요할 것 아닌가. 하지만 내게는 그것이 이 한 주 동안 일어난 일들 중 가장 중요한 문제다. 그러니까 나는 그들보다 경기를 더 잘 봐야 할 권리가 있고, 그렇다면 나는 그런 사람들 때문에 매표소나 출입구 앞에서 긴 줄을 서지 않아도 될 권리가 있단 말이다. 그런데 오늘 난 그 권리를 누리지 못했으므로, 굉장히 짜증이 치민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내 자신이 너무 유치하고 한심하게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내가 내고 있는 짜증이 부당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는 없다. 나는 9년이란 시간과 그 동안 대전에 소홀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성실함을 이유로 하여 ‘대전팬으로서의 특권 의식’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제 나는 내가 다른 많은 관중들보다 대전 시티즌과 좀 더 특별한 관계에 있다고 생각했고, 그 사실을 알아주지 않는 대전 시티즌 때문에 화가 났다. 


나는 어제 많은 관중들 속에 앉아서, 퍼플 아레나에 관중이 꽉꽉 들어차는 것이 그다지 기쁜 일이 아니며 사실 관중수 같은 것은 그다지 중요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대전을 보러 왔으니, 나의 대전이 부디 오늘만은 좀 멀쩡한 경기를 보여주길 바랐다. 바보 같은 모습, 버벅거리는 모습, 프로 축구팀의 모습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부족함이 많은 그런 모습은 부디 보여주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대전 시티즌은 그런 나의 바람 따위 간단하게 무시해 버렸고, 때문에 나는 수많은 학부모들이 모인 학예회에서 멍청하기 그지없는 실수를 반복하는 제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 되어서 괴로움에 인상만 찌푸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말이다. 대전 시티즌은 내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런 노력 없이, 아무런 양해도 구하지 않고 그냥 무임승차하는 것은 불쾌하다. 만약 나보다 더 오랫동안 대전 시티즌을 좋아하거나 응원해온 사람들 때문에 내가 대전의 경기를 25분 정도 놓쳐야 한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 참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대전이 2007년 정규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어느 팀에 승리하며 6강 진출에 승리했는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런 일을 겪어야 한다면 그것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결국 대전은 경기에 졌다. 유병수는 또 두 골을 몰아넣었고 고창현이나 박성호는 한 골도 넣지 못했다. 때문에 불만에 가득 찬 채 경기장을 나가니, 아니나 다를까. 경기장 앞 도로가 또 주차장이 되어버렸다. 빨리빨리 움직여야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를 탈 수 있는데 그 또한 고생스럽게 생겼다. 그래서 뛰다시피 바쁘게 움직여 겨우겨우 터미널에 도착했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톨게이트를 빠져나오는데, 저쯤에서 푸른 불빛을 밝히고 서있는 아레나가 보였다.






벌써 3년하고도 6개월 전 일이다. 그때 나는 흘끗 퍼플 아레나를 바라보았다가 감독님께 웃으며 말씀드렸다. 대전엔 가장 자랑스러운 게 두 가지 있어요. 퍼플 아레나랑, 감독님이요. 그러자 감독님께선 늘 그러시듯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이시며 말씀하셨다. 변하지 않고 늘 그 자리에 있는 건 경기장뿐이죠. 나는 그 때 그 말씀을 들었을 때, 어쩐지 조금은 서운하고 또 어쩐지 조금은 불안해서 감독님도 늘 그 자리에 계실 거라고 말씀드렸던 것 같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 달 후에 감독님은 우리를 떠나셨고, 또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왔다가 우리를 떠났지만, 퍼플 아레나만은 여전히 언제나의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서 아름답게 빛을 내며 서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가슴이 찡했다. 변하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이토록 가슴 든든한 일인 거구나- 생각했지만, 동시에 그만큼 쓸쓸하기도 했다. 처음에 나를 이 팀의 팬이 되게끔 했던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떠났다. 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지금 함께 있는 이들도 언젠가 우리를 떠날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권집이 우리 팀에서 은퇴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아직도 그런 꿈을 꾸는 내가 가여워졌다.


나는 이 팀을 사랑하는 한 이러한 꿈꾸기를 포기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언제까지고 계속해서 상처받을 것이 뻔하다.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것을 외면할 수가 없다. 나는 사랑이 깊어지면 늘 뒤돌아 도망치는 쪽을 택했다. 하지만 대전 시티즌에 대해서는 그럴 수가 없다. 도망치는 것이 얼마나 편한 일인지 그 순간 깨달았다. 도망조차 칠 수 없다면, 견디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비가 내리면 비를 맞아야 하고 눈이 오면 눈을 맞아야 한다. 대전 시티즌을 좋아하는 동안에는 날씨가 좋은 날이 별로 없을 것이다. 주로 날이 흐리거나 비바람이 불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꼼짝달싹할 수 없는 마음을 가지게 되어버렸다. 만약 다시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나는 절대로 축구팬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기회 같은 건 절대로 없을 것임을 알고 있기에, 나는 그냥 오늘의 패배를 빨리 잊는 것밖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사랑에 빠지는 일이란, 이렇게도 사람을 무력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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