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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508] 포항 vs 제주, 축구장 가는 길

dancingufo 2010. 5. 9. 23:07

  



01. 축구장 가는 길


한 달 전, 울산을 내려갈 때의 일이다. 봄이 갓 시작되던 무렵이라 경주에서 꽃놀이를 즐기려는 인파가 남쪽으로 몰려들었고 덕분에 내가 탄 버스는 서울 톨게이트 근처에서 한 번, 경주 톨게이트 근처에서 또 한 번, 한 시간에 10km 정도 밖에 움직이지 못하는 대참사를 겪었다. 덕분에 예상 시간보다 두 시간 늦게 울산에 도착한 나는 6시간 30분 동안 버스를 탔음에도 불구하고 경기는 후반 45분밖에 보지 못했고 다시 6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허탈한 하루를 보냈다.


때문에 이번에는 버스 대신 기차를 선택했다. 비용은 더 들지만 적어도 나만 부지런하게 움직이면 경기를 놓칠 위험은 없다는 이유.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동대구역으로, 동대구역에서 다시 무궁화호로 갈아타니 환승하는 시간까지 다 합해 네 시간 정도 걸린다. 혼자 가기엔 다소 지루한 시간 아닌가 하겠지만 들고 간 책이 꽤 재미있어서 (한비야의 <그건 사랑이었네>를 들고 갔는데 기차 타기 시작하며 첫 장을 펼쳐 읽었건만 포항역에 내릴 땐 마지막 장까지 다 읽은 상태였다. 그만큼 술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뜻!) 내려가는 길이 굉장히 짧게 느껴졌다.


그렇게 포항역에 도착하니 오후 1시 30분, 경기 시작까지는 여유가 있다. 햇빛이 굉장히 좋았고, 바닷가의 도시답게 선선한 바람도 아주 좋았고. 길을 잘 몰라 역 앞에 있는 마트에 들어가 물 한 병을 사며 버스 정류장 가는 길을 물었더니 나 같은 길치도 헤매지 않고 단번에 찾아갈 수 있을 만큼 상세하게 길을 알려준 언니도 친절해서 축구장 가는 길이 가는 내내 참 좋았다.


(역에서 시내 쪽으로 나와 101번 버스를 타면 포스코 본사까지 간다. 가는 데 15~20분 정도 걸리는데, 버스 안에 경기 보러 가는 꼬맹이들이 많아서 축구장 가는 분위기가 많이 났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떤 남자아이는 같이 있던 형에게 ‘포항이 제주에게 천 골 넣고 이길 것 같다.’라는 식의 얘기를 해서 나를 혼자 웃게끔 만들기도 했다. 그 아이는 제주에게 두 골 밖에 못 넣는 포항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02. 혼자서 보는 축구


당연히 혼자보다는 동행과 함께 축구장을 찾는 것이 즐겁지만, 그럼에도 혼자서 축구장을 다닐 때의 좋은 점도 있다. 그러니까 만약 동행이 있었다면 이번에도 나는 택시를 타고 휭~ 포스코 본사로 날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혼자 다니면 아무래도 택시비에 대한 부담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낯선 도시의 거리를 터벅터벅 걸어 버스 정류장을 찾아다니게 되는데 그렇게 걷는 거리가 짧은 여행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그리고 혼자 축구를 보면 수다 떨 사람이 없기 때문에 정말로 집중해서 축구만 보게 되고, 그래서 경기 내용이 더 잘 기억이 난다. 내가 대전 경기보다 다른 팀들의 경기를 더 자세하게 기억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다. 대전 경기는 늘 친구들이랑 우루루 몰려 다니면서 보니까. 그럼 수다 떨고 군것질하고 장난치고 하는 동안 경기가 저 만큼 지나가 버린다. 하지만 상암이나 수원처럼 관중이 많은 경기장엔 혼자서 가는 것이 별로다. 사람들이 많다보니 어쩐지 혼자 앉아있는 게 좀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주위 사람들 역시 조금 이상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하기 때문이다.



03. 아름다운 스틸야드


정류장에 내려 한 10분쯤 걸어 올라가면 스틸야드가 나타난다. 스틸야드에 올 때마다 하는 생각이지만, 이곳은 정말 아름다운 경기장이다. 물론 나에게 단 하나의 판타스틱한 경기장은 두말할 것도 없이 퍼플 아레나지만, 나의 홈 그라운드를 제외하고 한 곳을 꼽아보라 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스틸야드일 것이다.


25000명 정도 수용 가능한 이 경기장은 포항이라는 소도시에 알맞은 아늑함을 자랑한다. 관중석이 그라운드와 가까울 뿐 아니라 발코니 타입으로 만들어져 경기를 실감나게 즐길 수 있다는 게 큰 강점이다. 예전엔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어 다소 아쉬웠는데, 이제는 그것도 제거되어 경기가 더 잘 보인다. 게다가 1인 가용 공간도 꽤 넓은 편이라 편한 자세로 관전할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축구 전용 구장이라는 낭만적인 역사도 스틸야드의 자랑이다. 이곳은 비록 나의 홈구장은 아니지만, 어쨌든 나는 스틸야드를 굉장히 좋아한다. 그리고 이런 나의 애정 때문인 걸까. 스틸야드는 언제나 나에게 좋은 경기를 보고 돌아갈 수 있게끔 하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04. 차포 다 뗀 포항 vs 상승세의 제주 


경기장에 들어서 포항쪽 선수들을 보았더니 김형일도, 황재원도, 김재성도 보이지 않는다. 다들 어디 갔나 싶었는데, (돌아보니 바로 뒤쪽에 앉아들 있긴 하더라만) 생각해보니 곧 AFC 경기가 있는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집으로 돌아와 일정을 찾아보니 12일 수요일에 가시마 앤틀러스와의 16강 원정 경기가 있다. 이를 대비하기 위해서 모따, 황재원, 김재성, 신형민 등을 모두 다 뺀 모양이고 김형일은 경고 누적이라고 한다. (김형일은 대전 시절부터 카드를 굉장히 많이 받던 선수다. 그래서 아마 김형일은 은퇴할 쯤엔 경고수 신기록을 세우며 리그의 역사를 다시 쓸 거라는 농담을 하곤 했는데, 포항에서도 여전한가보다.)


이렇게 주전들이 왕창 빠진 포항이 요즘 한창 상승세인 제주를 만났으니 경기가 쉽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포항은 전반 14분에 이상협에게 선제골을 내주며 일찌감치 주도권을 빼앗긴다. 4분 뒤에는 구자철이 추가골을 기록하였는데, 이 때 포항 선수들은 구자철이 오프사이드라고 생각한 듯했지만 이상호의 패스가 빨랐기 때문에 아마도 오프사이드 트랙이 무너진 상태였을 것이다. 수비수들이 심판의 휘슬을 듣기도 전에 손을 번쩍 들며 멈춘 것은 포항의 실책. 구자철도 자신이 오프사이드가 아닌가 싶어 잠깐 멈추는 것 같았지만, 그대로 슛을 해 0-2가 되었다.


전반이 끝나기 직전 교체되어 들어왔던 고기구가 만회골을 넣으며 전반전은 1-2로 끝이 났다. 하지만 후반 28분, 김은중이 페널티를 얻어내면서 제주는 포항의 추격을 물리친다. 김은중은 자신이 얻은 페널티를 깔끔하게 골로 연결시켰고 이것으로 경기는 1-3. 물론 이대로 경기가 싱겁게 끝나지 않을까 했는데, 다시 골을 터트리며 추격의 의지를 보여준 포항도 나쁘지 않았다.


후반 40분, 정석민이 프리킥을 골로 연결시키며 스코어는 2-3이 되었다. 하여, 이제 경기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구나- 생각을 하는데 그 찰나 제주는 두 골을 연속으로 몰아넣으며 쉽게 승리를 차지했다. 정석민이 만회골을 넣자마자 제주의 산토스가 포항의 수비수들 사이를 정신없이 헤집고 들어가 골을 성공시켰고 그로부터 3분 후인 후반 44분, 구자철이 다시 한 번 슛을 터트리며 스코어를 2-5로 벌려 놓았다. (구자철의 두 번째 골은 이 날 터진 골 중 가장 멋있는 골이었다.)


경기는 그렇게 끝이 났다. 제주는 짠물 수비를 펼치며 리그 최소 실점을 자랑하는 팀이었지만, 또 그 만큼 득점 역시 적은 팀이었다. 지금까지 2-0으로 승리했던 대전과의 경기를 제외하고는 두 골 이상 성공시킨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 날, 제주는 무려 다섯 골을 터트리며 선두권에 속하는 팀다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05. 신바람 나는 제주 유나이티드


원래 시즌마다 초반에 반짝 상승세를 보이는 팀이 있다. 보통은 리그가 중반기로 접어들 때쯤 그 돌풍은 가라앉기 마련이고 늘 그래왔듯 자연스럽게 전통적인 강호들이 선두권을 이루곤 한다. 올 시즌 역시 경남이나 제주는 초반에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이며 K리그의 이슈가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내 느낌으로는, 제주의 이런 상승세가 초반에 잠깐 반짝하다 말 것 같지가 않다.


그 동안 직접 본 경기가 세 번, 중계로 한 경기 더 보았으니 총 네 번을 보았는데 제주는 갈수록 경기를 더 잘 한다. 지난 전남전을 보면서 제주 선수들이 굉장히 자신감에 차 있구나- 생각을 했는데, 이번에도 그 느낌은 여전하다. 게다가 제주 선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많이들 뛴다. 그 중에서도 공격수들의 활동량은 특별히 눈에 띄는데 배기종, 이상협과 같은 윙플레이어들이 수비에 적극 가담하는 것은 물론이고 김은중과 같은 중앙 공격수도 중앙, 사이드, 미들 지역을 넘나들며 경기를 한다. 협력 플레이가 잘 되기 때문에 공격권을 자주 따올 뿐 아니라, 선수들끼리 위치를 자주 바꾸어가며 경기하기 때문에 수비하는 입장에서는 애를 좀 먹을 듯하다. 


패스가 빨리 빨리 들어가는 것도 장점이고, 공수 간격이 좁은 것도 장점이다. 무엇보다 팀 분위기가 굉장히 좋은 데 박경훈 감독도 시종일관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아주는 타입이고 (골이 들어가면 굉장히 좋아하신다. 만면에 미소는 필수, 꼭 골 넣은 선수와 하이파이브를 하신다. 교체되어 들어오는 선수가 있으면 꼭 다가가 등을 토닥이거나 어깨를 감싸주신다. 경기가 끝나고 나면 이겼든 졌든 선수들 한 명 한 명의 어깨를 툭툭 쳐주시는데 그 또한 보기 좋은 모습이다. 제주는 감독과 선수들 사이에 신뢰가 쌓여가는 듯한 팀이다.) 선수들끼리의 분위기도 굉장히 화기애애하다.


이런 여러 가지 장점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나는 올 시즌 제주가 꾸준히 좋은 모습을 보여줄 거라고 생각한다.  이 팀을 좋아하는 팬들이 있다면, 아마 올 시즌은 정말 기대해 봐도 좋을 것이다.



06. 에피소드

 

하나. 김은중이 포항팬에게 박수를 받은 이유

선수 입장 후, 포항 선수들이 관중들에게 싸인볼을 던져주었다. 그런데 제주 벤치 쪽 W석에 있던 누군가가 싸인볼을 잡았다가 놓쳤는지, 벤치에 있던 김은중이 그 볼을 주워든다. 그리고 다시 던져줄 모양으로 관중들을 보자, 그 구역에 앉아있던 관중들이 서로 자기에게 달라며 아우성을 친다. 그러자 김은중은, 조금 난감하다는 듯 웃으며 (‘이 볼은 이 사람 거예요.’라는 식으로) 누군가를 가리키더니 딱 그 사람에게 공을 전해준다. (느낌으로는 어린아이에게 준 게 아닌가 싶다.) 그러자 W석에 앉아있던 포항팬들이 김은중에게 와- 하고 박수를 보낸다. 비록 상대팀 선수지만, 개념찬 모습이었다는 뜻의 박수다.


둘. 다정한 주장, 시크한 선수


위에서도 얘기했지만, 박경훈 감독은 누군가 골을 넣으면 굉장히 좋아하며 박수를 쳐주기 때문에 보통 골을 넣은 선수들은 감독에게 달려간다. 이 날도 마찬가지여서 이상협이 그랬고, 구자철이 그랬는데, 세 번째 골을 넣은 김은중은 다르다.


김은중은 골을 넣은 후, 자기에게로 달려오는 후배들 서너명을 두 팔로 한 번에 감싸안아준다. 마치 새끼새들을 품는 어미새 같은 모습이다. 그 모습이 좀 다정하게 느껴져서, 김은중은 어느 새 다정한 캡틴이 되었구나 생각하는데 웬걸, 정작 감독님에게는 그런 다정함을 보이지 않는다. 김은중은 하프라인으로 달려가며 반대쪽에 있던 서포터들에게 박수를 한 번 보내고, 그리고 자기를 향해 박수를 보내는 벤치쪽을 흘끗 보더니 이쪽으로 달려오진 않고 그냥 똑같이 박수를 치며 화답할 뿐이다. 그 이후에 골을 넣은 산토스도 세레모니를 할 때 감독에게 달려왔으므로, 결국 이 날 골을 넣은 제주 선수 중 박경훈 감독과 하이파이브를 하지 않은 건 김은중뿐이다. (물론 경기 다 끝나고 서포터들에게 인사한 후, 박감독님과 하이파이브를 하긴 했다.)


김은중은 다정한 주장이 되었지만, 선수로서는 여전히 시크하다. N석 모퉁이에 매달려 싸인해 달라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사내아이를 그냥 지나칠 때도, 난 김은중의 오랜 시크함을 엿보았다. (싸인을 해주고 간 선수들도 있다.) 잘못 보면 좀 건방져 보일 수도 있는데, 이상하게 나는 김은중의 그런 태도가 좋다. 아마도 김은중이 절대로 거만한 선수는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크함이 없었다면, 김은중이 그렇게 많은 일을 겪으면서도 한결같이 든든하고 흔들림없는 모습을 보이진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07. 사람처럼 사는 것

그렇게 경기는 2-5로 끝이 났다. 서포터들은 둘째 치고 시민들이 굉장히 열심히 응원했는데 무려 다섯 골이나 먹었으니, 다음 경기부터 스틸야드를 찾는 관중수가 주는 건 아닐까- 하고 괜한 걱정을 해본다. (그런데 포항의 다음 홈경기 상대는 대전이다. 요즘 대전은 관중 많은 데서 잘 못 이기니까 좀 적게들 오는 게 내 입장에서는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올라왔던 길을 그대로 걸어내려가, 아까 내렸던 정류장과 마주보는 곳으로 가니 고속 터미널로 가는 버스가 여러 대 있다. 그곳에서 102번 버스를 타고 한 20분쯤 가니 고속터미널이다. 표를 끊고 버스를 타니 6시 20분. 서울에 도착하니 11시. 그리고 다시 집에 도착하니 12시가 다 되어 있다. 아침 여덟시에 집에서 나섰으니 축구 한 경기 보느라 16시간 동안 혼자 헤맨 꼴이다.


실은 버스를 타고 올라오면서 문득 '난 왜 이렇게 살고 있는 건가?'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축구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고, 축구를 보는 일은 내가 정말로 즐거워하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늘 공부해야 해, 책을 읽어야 해, 글을 써야해, 하며 바쁜 척을 하고 시간이 없어, 나는 너무 바빠, 하면서 우는 소리를 해대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째서 축구 한 경기에 열여섯 시간씩을 투자하고 있는 것일까? 가끔 내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친구들 만나는 것도 꺼리면서 축구에는 이토록 너그럽게 구는 이유가 무엇일까? 실은 난 이런 나를 조금 한심해 하고 조금 답답해 한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당분간은 내가, 이런 모습에서 크게 달라지지 못할 거란 걸 안다. 보고 싶은 경기가 있으면 그 경기가 어디서 열리든 달려가 볼 거라는 것도 말이다.

게다가 요즘 축구는, 마치 저가 나의 꿈이라는 되는 것처럼 반짝반짝거린다. 이것을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언젠가는 지금과는 조금 달라질 것이다. 나는 축구가 언제까지고 지금과 같은 애타는 무엇으로 존재하진 않을 거라고 믿는다. 그러니 그때까지는 그냥 나를 이대로 내버려 두어야겠다. 살다보면 슬픈 게 많고 우울한 게 많고 고민할 게 너무 많다. 그러니 이렇게 즐거운 것이 (때로는 또 그만큼 괴롭기도 하지만) 한 가지쯤은 있어야 사람처럼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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