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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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도 눈물도 없이

2010년 3월, 요즘 내가 읽는 것들

dancingufo 2010. 5. 11. 12:00

 

<구입한 책>

폴 오스터, 거대한 괴물

다니엘 클라타우어,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아르토 파실린나, 기발한 자살여행


<읽은 책>

닉 혼비, 슬램

빌 브라이슨, 재밌는 세상

폴 오스터, 달의 궁전

폴 오스터, 빵 굽는 타자기

한비야,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1)

한비야,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2)


 

 



닉 혼비, <슬램>


3월에는 총 여섯 권의 책을 읽었는데, 이 책은 정말 최고다! 라고 할 만한 책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책이 다 평균 이상으로 좋아서 꽤 만족스러운 독서를 했다. 첫 번째 책이 닉 혼비의 <슬램>이었으니 일단은 시작부터가 훌륭했달까.


실은 혼비의 신작이 나온 걸 모르고 있었는데, 영풍 문고에 놀러갔다가 <슬램>을 발견했다. 그리고 대체 이걸 내가 왜 모르고 있었을까! 하는 자책에 빠져, 집에 돌아오자마자 인터넷에 접속해 <슬램>을 주문. 그래서 3월의 첫 번째 책은 이 책이 되었다.


혼비의 주인공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별다른 거창한 꿈이 없는’, ‘그냥 스케이트나 타면서 살고 싶은’, ‘아직은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덜 자란 남자아이다. 그나마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슬램>의 주인공인 샘은 실제로도 덜 자란 남자아이이며 그러므로 좀 더 있다가 어른이 되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점이다. (혼비의 다른 이야기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나이는 이미 어른의 나이면서 마음만 소년인 남자들이었다.)


그런데 샘은 예상치 못한 사건을 겪으면서 떠밀리다시피 하며 어른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첫 눈에 반해 잠깐 사귄 여자친구가 임신을 하게 된 것이 그 사건. 자신이 아빠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샘은 스케이트를 타다가 ‘슬램’을 당한 것 같은 충격에 빠진다. 그래서 도망도 가보지만 현실은 달라지지 않고, 샘은 어쩔 수 없이 그냥 그럭저럭 참고 견디는 것으로 (어쩌면 그냥 떠밀리면 떠밀리는 대로 가만히 있는 것으로) 현실에 적응한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문득, 샘은 이 삶이 자신이 원한 삶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삶 역시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는 옛 여자친구를 버리고 도망가야 할 만큼 이 삶이 끔찍한 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샘은 이 삶속에서 그럭저럭 잘해나가기 위해 노력을 한다. 크게 거창한 노력은 아니지만, 어쨌든 샘은 버텨낸다는 말이다.


혼비의 멋진 점은 바로 이런 점이다. 주인공이 뭔가 굳은 의지를 가진다거나, 큰 결심을 하지 않는다는 점. 우리네와 비슷하게 (또는 그보다 더) 답답하고 한심하며 비겁하다는 점. 그런데도 어떻게든 자신에게 닥쳤던 난관을 그럭저럭 잘 넘어간다는 점. 비록 멋지게 뛰어넘거나, 그리하여 인생 역전을 이루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지만 결국 혼비가 보여주는 결론은 그 상황에 걸맞는 정도의 해피엔딩이다.


물론 나는 혼비의 주인공들처럼 살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다. 하지만 내가 혼비의 주인공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으며, 실은 그들보다 나은 점 역시 거의 없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때문에 혼비의 이야기를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그의 이야기는 재미있지만 슬프다. 내가 혼비의 이야기들을 통해 위로를 받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저 어느 정도의 체념을 배우며, 동시에 그렇다고 해서 너무 좌절할 것까지는 없다는 것. 그럭저럭 힘을 내어 걸어 가다보면 또 뭔가 재밌거나 즐거운 일이 생긴다는 것. 인생이 그렇게 멋지지는 않지만 몇 번쯤 힘을 내어 견뎌도 될 만큼은 살아볼 만 하다는 것을 느낀다.  이런 것을 깨닫고 느끼고 배우는 건 좀 슬픈 일이다. 그렇지만 사는 건 그냥 원래 그런 것이다. 원래 기대했던 것보다 좀 궁상맞고 구질구질하고 그렇지만 중간중간엔 미처 생각지 못했던 소소한 기쁨 같은 것도 짜잔- 하고 나타나는 그런 것. 그러니까 내가 보기에, 혼비가 보여주는 것은 우리들의 진짜 인생이다.

 


 

빌 브라이슨, <재밌는 세상>


<슬램>을 다 읽은 후에는 빌 브라이슨의 <재밌는 세상>을 읽었다. 이 책은 빌 브라이슨이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는 성장 에세이이다. 어린 시절의 카츠(카츠! 그 문제의 카츠!)가 등장한다는 것 말고는 크게 인상 깊은 책은 아니지만, 어쨌든 읽는 동안에는 나름대로 재밌었다. 제목처럼 나름대로 ‘재밌는 세상’이긴 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카츠는 브라이슨에게 <나를 부르는 숲>이 거의 지어낸 이야기라고 했다는데, 그렇다면 카츠는 그 때의 그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만약 카츠가 그때의 애팔래치아 트레일 종주에 대해 썼다면 어떤 이야기를 남겼을까? 난 그것이 무척 궁금하다. 그러니까 실은 난, 브라이슨보다도 카츠를 좋아하는 더 독자인지도 모른다. 비록 카츠가 브라이슨보다도 더 뚱뚱하고, 그래서 종주를 하다가 무겁다는 이유로 무게가 5g도 안 될 커피 내려먹는 종이까지 내던지는 인물이더라도 말이다.

 


폴 오스터, <달의 궁전>


그 다음으로 읽은 책은 <달의 궁전>이다. 지난 2월에 <브루클린 풍자극>을 재미있게 읽은 후 폴 오스터의 책을 여러 권 사들였다. 사람들은 어떻게 한 권만 읽고 그 작가의 책을 그렇게 여러 권 사들일 수 있냐고 묻지만, 내가 그렇게 했던 작가 중에 실망했던 작가는 단 한 명뿐이었으니 (<밤의 피크닉>으로 나를 사로잡았으나, 그 외의 책들을 통해서 끊임없이 날 실망시켰던 온다 리쿠가 그 주인공) 이렇게 행동하는 데에 별 망설임이 없다. 게다가 폴 오스터의 책을 출판한 ‘열린책들’에서 무슨 이벤트에 당첨되었다 하며 나에게 ‘10만원짜리 신세계 백화점 상품권’을 보내왔다! 사실 난 내가 책을 사면서 이벤트에 응모했다는 기억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데! 그래서 이게 무슨 횡재냐 생각하며, ‘열린책들’을 더 좋아하게 되었고, 덩달아 폴 오스터의 책들도 더 예뻐하게 되었다는 사실;


여하튼 그래서 폴 오스터의 책이 꽤 여러 권 책장에 꽂혀 있는데, 그 중에 뭘 읽을까 하다가 <달의 궁전>을 선택했다. <달의 궁전>이라는 제목은 묘하고, 은은하고, 낭만적이고, 아름답지만, 왠지 행복하게 들리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런가. 이 책에 담긴 이야기도 기묘하고,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듯 불확실하며, 결국 사랑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식의 낭만을 담고 있어 아름답지만, 결국 주인공에게 행복을 선물하지는 않는다.


사실 난 이 책이 <브루클린 풍자극> 만큼 좋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폴 오스터가 도리스 레싱이나 닉 혼비처럼 모든 책이 다 아주! 굉장히!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작가는 아니겠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에 또 폴 오스터의 책을 읽은 것은 당시 책장에 딱히 손가는 책이 없었던 탓도 있다. 하여, 나는 <빵 굽는 타자기>를 읽었는데 이 책을 읽는 동안은, 음음- 뭐랄까. 여하튼 기분이 묘했다.



폴 오스터, <빵 굽는 타자기>


“내 꿈은 처음부터 오직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나는 열예닐곱 살 때 이미 그것을 알았고, 글만 써서 먹고 살 수 있으리라는 허황한 생각에 빠진 적도 없었다. 의사나 경찰관이 되는 것은 하나의 <진로 결정>이지만, 작가가 되는 것은 다르다. 그것은 선택하는 것이기 보다 선택되는 것이다. 글쓰는 것 말고는 어떤 일도 자기한테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평생 동안 멀고도 험한 길을 걸어갈 각오를 해야 한다. 신들의 호의를 얻지 못하면(거기에만 매달려 살아가는 자들에게 재앙이 있을진저), 글만 써서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다. 비바람을 막아 줄 방 한칸 없이 떠돌다가 굶어 죽지 않으려면, 일찌감치 작가가 되기를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이해했고 각오도 되어 있었으니까, 불만은 없었다. 그 점에서는 정말 운이 좋았다. 물질적으로 특별히 원하는 것도 없었고, 내 앞에 가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겁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원한 것은 재능-나는 이것이 내 안에 있다고 느꼈다-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 그것뿐이었다."


이것은 <빵 굽는 타자기>의 두 번째 페이지에 나오는 구절이다. 나는 이 구절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이 구절을 읽자마자 이 책을 좋아하게 되었다. 자신에게 재능이 있음을 믿는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폴 오스터는 굉장한지! 그래서 나는 폴 오스터의 나머지 책들도 모두 다 읽기로 했다. 왜냐고? 그런 걸 믿을 수 있다니, 정말로 굉장하지 않은가? 글쓰기에 재능이 있다는 건, 달리기에 재능이 있다는 것과 다르다. 달리기는 100m를 내가 남들보다 몇 초 더 빠르게 뛴다는 것, 그러므로 나에게는 재능이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머리로 납득할 수 있지만 글쓰기에 재능이 있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 확인할 수 없다는 말이다. 누군가 '너에겐 재능이 있어.'라고 말해준다 하더라도 스스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다면, 또한 글쓰기만이 자신이 할 일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자신에게 글을 쓰는 재능이 있다는 것은 절대로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때문에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며 가슴이 뛰었고, 단번에 이 책에 높은 점수를 주었으며, 덕분에 가끔씩 책이 지루해지는 순간에도 전혀 지루해하지 않고 이 책을 끝까지 읽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읽어낸 이 책을 통해서 내가 알게 된 건, 폴 오스터가 언제나 끊임없이 글을 썼다는 것이고 그것이 그에게 진짜 재능을 가지게 했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신기한 일이다. 10년 전에 나는 (그리고 15년 전에도 나는) 에세이나 자서전이 싫었는데, 이제는 이런 책들이 꽤 재미있다. 나이가 들며 자연스럽게 입맛이 바뀐 것처럼, 책에 대한 취향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자기 계발서 같은 것들도, 10년이나 15년 후에는 재미있게 읽게 될까? 아니라고는 단언할 수 없다는 것, 그래, 그게 참 신기한 일이라고.



한비야,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 (1)~(4)


그리고 이 달에 좋아하게 된 작가가 있다면, 그는 바로 한비야이다. 이 유명한 인물을 이제 와서 좋아하게 되다니 좀 새삼스런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나는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을 읽은 후에 한비야라는 ‘작가’를 드디어 좋아하게 되었다.


한비야를 처음 읽은 건, 1년쯤 전의 일이다.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를 통해 그녀를 처음 만났는데, 처음 만남에서부터 나는 그녀가 굉장히 ‘대단하다!’라고 생각했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


좋아하는 작가도 많고, 또 저 사람은 참 훌륭하구나- 라고 생각되는 사람도 간혹 있지만, 한비야는 좋아한다거나 그래서 팬이라거나 하는 그런 마음보다도 삶을 대하는 태도가 정말로 굉장하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 태도를 배우고 싶었고, 그래서 늘 한비야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을 읽은 후에는 (1권과 2권은 3월에, 3권과 4권은 4월에 읽었지만 어차피 다 지난 시간이니 한 번에 거론하기로 하자.) 정말로 한비야를 좋아하게 되었다. 유려한 글솜씨라든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신이 느낀 바를 이토록 생생하게 전달해내고, 그 이야기를 통해서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에게 가지각각의 것을 느끼게 해줄 수 있다면, 그 또한 작가로서 매우 훌륭한 재능을 갖춘 것이 아닌가- 하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나는 한비야처럼 오지 여행가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어려운 사람들은 돕고 싶고, 물과 전기를 아껴 쓰고 싶지만) 긴급 구호팀에서 일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다만 나는, 한비야처럼 용기 있게 살고 싶다. 그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수식어들을 사용하게 되지만, 그 중에서도 단 하나의 표현만 써야 한다면 그게 바로 ‘용기있다’가 아닐까 싶다.

 

나는 언제나 내가 비겁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더불어 비겁한 게 왜 나쁜 거냐고 되물어 왔다. 나는 무서워서 눈을 감고, 외면하고, 도망가는 나를 보면서도 그러면 왜 안 되는 거냐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한비야를 보다보니 조금 알겠다. 그래, 비겁한 게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비겁하게 살다보면 나중에 많은 것들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를 내가 원하는 곳에 데려다 놓으려면 용기가 있어야 했던 것이다. 새삼스러운 사실이지만, 지금까지 이 사실을 깨우쳐준 이가 한비야 말고는 없었다.  


그래서 한비야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 마음에 드는 작가. 내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어떤 이름. 이런 사람을 무심코 지나치지 않고, 이렇게 읽고, 알고, 가까이 느끼게 된 것은 정말로 큰 행운이다.

 

그리고 이미 5월도 중순을 향해 가고 있는 시점에 이 리뷰를 쓰고 있으니 하는 말이지만, 얼마 전에 읽은 <그건 사랑이었네>는 나로 하여금 다시 한 번 더 한비야에게 박수를 보내도록 만들었다. 보스톤에서 돌아오면 또 책을 한 권 쓰시리라 믿는다. 그전까지 또 눈에 물파스 발라가며 열심히 공부하실 테니, 그 책을 기다리는 동안 나 역시 지금보다 조금 더 열심히 살고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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