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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15] 성남 0 vs 0 대전, 열심히 해주었다는 것만으로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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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15] 성남 0 vs 0 대전, 열심히 해주었다는 것만으로도

dancingufo 2010. 10. 19. 12:57

01. 


대전 경기를 보기 위해 탄천에 가고 있다는 내 말에, 언니는 ‘넌 대체 왜 그러는 건데?’라고 물어왔다. 그 말에 대답할 말이 없어 그냥 웃어버린 건, 나 역시 내가 왜 이러는 건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대전이 울산에 다섯 골이나 내주며,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희망 같은 건 찾을 수 없는 경기를 한 것이 2주 전의 일. 그 경기를 보고 나오며 ‘이젠 정말 지겨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겹다는 것과 그래서 끝이라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나는 이제 정말이지 지긋지긋하고 대전 시티즌이라고 하면 조금도 설레거나 즐겁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대전 시티즌의 경기를 보러 간다.


02.


탄천은 춥다. 그리고 사람이 별로 없다.


사실 남의 팀 관중 적은 건 나하고 별로 상관없는 일이다. 뭐, K리그가 발전하고 인기도 많아지고 그래서 매 경기마다 관중들이 꽉꽉 들어차고 그러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K리그가 크게 문제 있는 리그라고 생각지도 않고, 관중을 많이 끌어 모으지 못하는 것이 약점이라거나 단점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때때로 관중석에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번처럼 대전 벤치 뒤 W석에 관중이 딱 두 명, 바로 나와 나의 지인밖에 없는 것이 바로 그런 경우다. 그런 경우엔, 왠지 좀 머쓱해진다. 그런데, 거기 앉아있는 우리가 신기하다는 듯이, 라커룸을 드나드는 대전 선수들이 빤히 우리를 쳐다보면 조금 더 머쓱해진다. 그래서 잠깐, 자리를 옮길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래도 대전 선수들이 자신들의 벤치 뒤에 단 한 명의 팬도 없는 채로 경기를 하게끔 하고 싶진 않아서(그러니까, 아직도 대전에 이런 엄마 마음 같은 게 든다. 이 무슨 지고지순한 마음인지!;) 그냥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얼마쯤 시간이 지나니 (비록 성남팬들이긴 했지만) 우리 말고도 몇몇 관중들이 조금 더 그 구역에 앉아서 이제 좀 한결 낫군- 하는 마음으로 경기를 보기 시작했다.



03.


사실, 이길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조차 없었다. 정말이다. 어쩌다가 아주 우연히 우리가 이길 수도 있어! 라는 생각조차 안 했다. 내가 생각한 것은 0대 3이거나 0대 4같은 스코어였고, 그래서 그렇게 많은 골을 내주며 패한다 하더라도 절대로 상처받거나 우울해지지 않게끔 미리 마음을 단단히 먹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경기가 시작한 후,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도 골을 내주지 않기에 ‘우와- 대단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0대0인 채로 30분이 지났을 땐, 이만큼이라도 버텨주고 있으니 우리 선수들이 장해, 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전반 40분이 되었을 땐 제발 0대0인 채로 전반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전반 동안 골을 내주지 않고 잘 버텨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절반의 성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게 끝이 아니었다. 후반전이 시작한 후에도 대전은 성남을 잘 막아냈다. 몰리나의 슈팅이 몇 번이나 ‘이번엔 정말 골이야!’하는 느낌으로 대전의 골문을 향했지만, 그 슈팅은 매번 아슬아슬하게 골문을 비껴나갔다. 후반 들며 대전은 전반전보다 많은 공격 기회를 내주었지만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성남의 공격수들을 악착같이 따라다녔다. 그런 모습이 결국 나를 조금 설레게 해, 후반 20분쯤 되자 나는 드디어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오늘 우린 지지 않을지도 몰라.’



04.


우리는 리그에서 13위 팀이고, 이 경기까지 포함하여 남은 다섯 경기에서 전승한다 해도 플레이오프에는 진출할 수 없다. 꼴찌냐 아니냐의 문제가 남아있긴 하지만, 업다운 제도가 없는 이상 13위든 15위든 그리 큰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이 경기에서 지고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당연히 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지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선수들이 열심히 뛰고 있었으니까. 몇 년 내내 툭하면 우리를 괴롭혔던 리그 상위권의 팀을 잘 상대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선수들이 보람 같은 걸 느낄 수 있게, 허탈함 같은 것을 느끼지 않아도 되게, 어떻게든 패배를 피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가진 순간부터 관중석에 앉아있는 내 마음은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05. 


후반 20분부터 경기가 끝날 때까지의 시간은 그야말로 1분 1초가 가슴 졸이는 시간이었다. 공이 우리 진영으로 넘어올 때마다 나는 죽을 것 같았고, 몰리나나 라돈치치가 우리 골문 앞으로 뛰어가면 나도 모르게 눈을 감게 되었다. 어쩌면 어경준이, 또는 권집이 거짓말처럼 골을 넣고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꿈을 꾸자 혹시나 너무 많은 걸 바라는 나를 축구의 신이 벌할까봐 겁이 났다. 그래서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래, 지지만 않으면 돼. 패배만 없으면 돼.


정말이다. 나는 승리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그저, 허탈하게 패하고 돌아가는 모습만 보지 않는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06.


그런데 정말로 경기는 무승부로 끝났다. 우리는 골을 넣지 못했지만 성남도 골을 넣지 못했다. 우리는 고작 승점 1점을 가져왔을 뿐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선수들이 매우 장하게 느껴졌다. 때로는 열심히 해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승리의 기쁨 같은 것이 느껴진다. 늘 상위권에 드는 팀의 팬들은 웬만해선 이해하기 힘든, 그런 기쁨이 나에게 있다.



07.


실은 한동안 5월 22일, 부산과의 컵대회 경기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 경기는 지난 10년간 내가 본 대전의 경기 중 최악의 경기였다고 말할만한 것이었다. 우리가 1대4로 패했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그보다 더한 점수차의 패배도 많이 보았다. 그런데도 내가 그 경기를 유난스레 끔찍하게 여긴 건, 그 경기에서 대전 선수들은 툭하면 화를 냈고, 심판에게 대들며 항의를 해댔고, 상대팀에게 망설임 없이 살인 태클을 날렸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곧 싸움이 일 것 같은 분위기였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어느 누구 하나 선수들의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최은성이나 강정훈이 없는 대전은 성숙하고 노련한 태도로 선수단을 휘잡을 리더를 찾지 못한 듯이 보였다. 꽤 경험이 많은 박성호도 후배들과 똑같이 흥분하고 있었고, 고창현은 심판에게 달려들어 항의를 하다가 결국 퇴장을 당해 ‘우리 루니는 그런 애가 아니야!’ 라고 주장해왔던 나를 할 말 없게 만들었다. 권집은 그나마 이성을 지키고 있는 듯 보였지만, 다른 선수들의 행동에 큰 관심 없다는 듯 제 3자처럼 행동했다.


대전 선수들은 프로답지 못했고 (이렇게 말하면 미안하지만) 어리석어 보였으며 그래서 한심했다. 나는 그 경기를 보면서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나중에는 슬펐다. 경기장을 빠져나오면서, 엄청나게 화를 냈지만 실은 울고 싶었다. 어떻게 내 팀이 이럴 수가 있지? 라고 생각했다. 못하는 건 괜찮았다. 계속해서 패배를 당하거나, 시즌 내내 이기지 못하거나, 툭하면 대패를 당하는 것도 괜찮았다. 하지만 프로답지 못하게 행동하는 건 싫었다. 나는 처음으로 대전 시티즌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한동안 대전 경기를 보러 갈 수가 없었다.



08.


그런데 대전은, 세 골을 내리 먹고도 다시 세 골을 따라잡아 패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팀이 되었고 리그 강팀을 상대로도 주눅 들지 않고 끝까지 포기하지도 않고 자신들의 경기를 하려고 애쓰는 팀이 되어 있었다. 내가 바란 것은 그냥 그런 것이었다. 대전이 자신들의 플레이를 하는 축구팀으로 존재하는 것. 할 수 있을 만큼은 최선을 다하는 것. 그렇다면 된 것이다. 그렇다면 희망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09.


어경준은 플레이가 뜻한 대로 풀리지 않으면, 또는 자신에게 오는 패스가 길거나 짧으면, 골을 많이 먹거나 동료들과의 호흡이 맞지 않으면, 동료에게 화를 내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이번 성남전처럼 그럭저럭 자신들의 플레이를 보인 경기에서는 그나마 낫지만 울산전처럼 상대에게 말려버린 경기에서는 계속해서 짜증스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경준이 최근 들어 골을 가장 잘 넣는 대전 선수라 해도, 이 선수를 아직까지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팀 플레이를 할 마음이 없는 스트라이커는 절대로 팀의 에이스가 될 수 없다.


GS 시절에 제대로 경기를 뛰지 못하다가 대전에 와서 주전을 꿰찼으니, 아마 좋은 모습을 보여서 다시 친정팀으로 돌아가고 싶을 것이다. 무상 임대되어 왔으니, 아직까지 대전이 내 팀 같다는 생각이 덜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대전에서 뛰는 이 시간이 어경준에게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거라는 사실이다. 어경준이 좋은 실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경기에 나가지 못한다면 그 실력을 입증할 수 없다. 그런데 대전은 어경준에게 자신의 실력을 마음껏 보여줄 기회를 줄 수 있는 팀이다. 그렇다면 어경준은 그 기회를 잡아야 한다. 잠깐 서너골 몰아넣으며 반짝하는 그런 식으로가 아니라, 경기가 잘 풀릴 때든 그렇지 않을 때든 늘 믿음이 가는 해결사로서의 플레이를 보여주는 그런 식으로 말이다.


나도 어경준의 경기를 몇 년 동안 꾸준히 본 것은 아니니 쉽게 판단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최근 몇 경기에서는 경기 도중 보여주는 태도가 다소 실망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우리 팀 선수니까 싫을 리도 없고 미울 리도 없다. 그러니 다음 경기에는, 또 어쩌면 다음 시즌에는 지금보다 조금 더 성숙한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10.


최근 들어 대전에서 가장 눈에 띄는 선수를 한 명만 꼽으라 한다면, 당연히 한재웅일 것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한재웅이 대전으로 이적한 후 처음 올렸던 공격 포인트는 바로 수원전에서의 어시스트였다. (2008년 7월, 퍼플 아레나에서 열린 수원전이었다.) 골을 넣은 것은 에릭이었지만, 그 골에서 인상 깊었던 건 에릭보다도 한재웅이었다. 그래서 계속 한재웅을 기억하고 있었다.


6년 동안 내가, 그렇게 정답게 편애했던 주승진과 트레이드되었던 선수. 그래서 괜스레 못마땅하게 여기고 싶었던 선수. 그런데 막상 뛰는 모습을 보니 못마땅하게 여기기가 힘들었던 선수. 하여, 잔뜩 기대를 했건만 갑자기 수비수가 되어 나타나 어째서 한재웅을 공격수로 쓰지 않는 거냐며 아쉬운 소리를 하게 만들었던 선수. 알고 보니 수비도 공격 만큼이나 잘 소화해냈던 선수. 그 선수가 바로 한재웅이다.


그런데 한재웅이 올 시즌 삭발을 하고 나타났을 때, 나는 그를 못 알아보았다. 대신, 누군가 우리의 측면에서 너무나 열심히 뛰고 있어, 윙백인지 윙포워드인지 알 수 없는 저 선수는 누구인가 싶어 찾아보았더니 그 선수가 다름 아닌 바로 한재웅이었다. (한재웅은 수원전에서 도움을 기록했던 때는 윙포워드였지만 한동안 윙백으로 뛰었으며, 내가 한재웅을 못 알아본 그 경기에서도 윙백이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다시 윙포워드를 보고 있다. 둘 다 나쁘지 않지만 개인적으로는 윙백일 때가 조금 더 마음에 든다.) 


한재웅의 진가를 재발견한 건, 8월 28일 퍼플 아레나에서 열렸던 제주전에서였는데 그 날 대전은 제주에 1대3으로 패했지만 사실 경기 내용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제주의 무서운 측면 공격을 잘 막아냈을 뿐 아니라 틈틈이 매서운 역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 수비와 공격 모두의 중심에 한재웅이 있었는데, 덕분에 나는 패하고 나오면서도 이 정도라면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번 성남전에서는, 제주전에서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재웅은 여전히 대전 공격의 중심 역할을 했다. 플레이가 조금 투박한 점, 쉽게 흥분하는 점, 오프사이드 트랩에 자주 걸리는 점 등은 조금 아쉽지만 늘 투지에 넘치는 태도로 경기에 임하기 때문에 팬으로서 어여삐 여기지 않을 수 없는 선수다.


그런데 성남전 막판에 부상으로 교체아웃되어 마음이 편치 않다. 느낌으론 큰 부상 같지는 않았는데, 이제는 달리 알아볼 곳도 없고 하니 마음만 졸이고 있다. 부산 시절에 큰 부상을 입었던 선수라고 알고 있다. 그런 만큼 더더욱 계속해서 부상을 잘 피해갔으면 좋겠고, 이번 부상 역시 하루 잠깐 아프고 말 그런 것이길.

 


11.


그 외의 선수를 두 명만 더 이야기하자면, 신준배 골키퍼가 꽤 괜찮았고 권집은 확실히 체력 분배를 잘 하게 되었다. 이제는 90분을 크게 힘들어하지 않고 소화해내는 모습을 보니 괜스레 흐뭇하다. 지금 완장을 차고 있는 황지윤이 다음 시즌에는 군입대를 한다는 얘기가 있다. 아쉽지만그렇게 된다면, 다음 시즌쯤에는 권집이 대전의 캡틴이 되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12.


오랜만에 대전의 경기를 본 후에 웃으면서 나왔다. 이제 남은 경기는 네 경기. 포항, 수원과는 홈경기가 경남, GS와는 원정경기가 남아있다. 딱 보기에도 쉬워보이는 경기가 하나도 없다. 포항은 올 시즌 10위에 머물러 있긴 하지만, 그래도 부자는 망해도 3년 간다고 했다. 포항은 포항으로서의 위엄이 있으므로 만만하게 볼 수가 없다. GS, 경남이야 현재 리그에서 2위와 4위를 차지하고 있으니 당연히 어려운 상대다. 게다가 GS는 내 기억으론 2005년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는 팀이다. 그리고 수원은, 전력상에서가 아니라 대전과 수원의 특별한 관계(?)상 가장 해볼만한 상대긴 하지만 대신 가장 긴장되는 상대기도 하다. 바람이 있다면 수원과 GS를 잡고 2승을 올리는 것이지만, 그게 힘들다면 남은 네 경기 중 한 경기라도 꼭 이기길!


춥고 황량한 탄천에서 고생 많았다. 다음주 수요일까지 잘 쉬고 잘 훈련하길. 곧 다시 만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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