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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22일, 한없이 아름다운 공간. 본문

아무도 모른다/2012.01 ~ 2012.12

2012년 10월 22일, 한없이 아름다운 공간.

dancingufo 2012. 10. 23. 00:23

 

 

다행히도, 롯데 자이언츠를, 대전 시티즌 만큼은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만약, 롯데를 대전 만큼이나 좋아했다면, 나는 너무 슬퍼서 견디기 힘들었겠지.

 

 

 

처음부터, 두산은 무섭지 않았지만 SK는 조금 무서웠어. 오히려 삼성이라면 헛된 꿈이라도 꾸었겠지만, 나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언제나 SK라서.

 

그래서 꿈꾸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 바보들이, 고작 선발 투수 2명 데리고, 어떻게 어떻게 플레이오프 5차전까지 끌고 가서.

 

어쩌면 이번엔, 하늘이 우리편을 들어주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살짝, 또 다시,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 그래, 그건 뭐, 다 내 잘못이지만.

 

그냥, 너무 허탈한 건, 그렇게, 그런 식으로 지지는 않았어야 했는데.

 

 

 

 

 

므찌나, 일년 동안 참 고생 많았어. 지난해만 해도 그렇게 잘하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별로 감흥이 없었는데. 나는 이번 준PO와 PO를 겪으면서 손아섭이 우리꺼여서 정말 좋다고, 참 기쁘다고, 네가 그렇게 귀엽고 어여쁠 수가 없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네. 한 경기 한 경기, 늘 마지막인 것처럼 죽도록 열심히 해줘서 고맙구나. 다른 팀 선수였다면, 손아섭이 한국 야구 선수 중에서 제일 싫었을 거야. 이해할는지 모르겠지만, 이게 야구 선수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란다.

 

꿀형, 내가, 웬만하면 흔들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사람들이 죽도록 고원준은 까면서 김성배한테는 꿀성배 꿀성배 그러는 게 영 못마땅해서, 뭐가 그렇게 대단한가 어디 한 번 지켜보자, 라는 심정이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롯데에서 내 마음에 드는 투수를 찾았다. silent assassine. 우리가 힘들 때면, 늘 어디선가 조용히 나타나서, 공 몇 개로 상대 타자들을 단숨에 제압해 버리고, 다시 조용히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김성배가 있어서, 나는 얼마나 든든하고 고맙고 뿌듯하고 즐거웠는지 몰라. 2012년에, 롯데 야구를 봐서 얻은 게 있다면 그건 꿀형을 알게 된 거야. 시즌 내내 정말 고생 많았으니까, 오프 동안 잘 쉬고, 내년에도 부디 튼튼하자.

 

시즌 내내 어이없는 제구력을 보이며, 그렇게 감독이 물고 빨고 해주는데도 결국 두 번이나 2군으로 쫓겨났던 고원준. 만약 다섯 명의 선발 중 세 명의 선발이 부상으로 아웃되지 않았다면, 그 고원준을 가을 야구에서 볼 일은 없었을 텐데. 막상 플레이오프에 들어서서는 온갖 걱정에 사로잡힌 팬들의 마음이 무색하게, 상대가 도저히 치기 힘든 공들을 툭툭 던져주었지. 처음으로 서보는 큰 무대에서, 최고의 타자들을 상대하면서도, 긴장하는 기색이라곤 도무지 찾아보기 힘든 고원준을 보면서, 너도 참 보통애는 아니다는 생각도 들고, 왜 고원준이 좋아졌던가 하는 것도 다시 생각이 났네. 사람들이 너를 미워하는 건, 그렇게 잘할 수 있으면서 잘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걸 스물세 살의 네가 이해할는지는 모르겠다만. 한살 더 먹으면 제발 한 해 만큼 더 성장해서, 내년엔 부디 제대로 야구하자.

 

그리고 볼 때마다 마음 찡한 조캡. 조캡의 얼굴을 반쯤 부셔놓았던 그 채병용을 못 털어서 우리가 진 게 너무 화난다. 나이가 많다느니 끝물이라느니, 사람들이 아무리 그런 말을 해도 나에게 조캡은 언제나 조캡이에요. 준PO 첫 경기 이후, 내내 마음 고생 많았을 텐데 그만 툴툴 털어버리고, 내년에도 롯데에 계셔주세요.  

 

조금 멍청하고 조금 스타병에 빠져 있지만, 그래도 볼 때마다 귀엽고 흐뭇한 황청아. 암만 봐도 너는 야구 DNA는 타고 난 것 같아. 내가 참 최정이 탐났는데, 황재균이 열심히만 해준다면 이제 더는 최정이 부럽지 않을 것 같단다. 그러니까 내년엔 만루에서나 중요한 찬스에서만 잘하지 말고 꾸준히 잘하는 황재균이 되어줘.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필이면, 만회의 기회랄 게 없는 마지막 경기에서, 이토록 허망하게...

 

...... 속상하겠지만, 이번에도 잘 버텨라. 어쨌든, 다음 시즌이 오기 전까지는, 죽일 놈 취급을 받을지도 모르겠다만. 그래도 진짜, 우리는 너를 좋아해. 그것 하나만 의심하지 않고 믿어준다면, 이번에도 버틸 수 있겠지. 걱정하지 않아도, 실은 꽤 강하고 튼튼하니까, 잘 이겨내주리라고 믿어. 아픈 데가 있다면 어서 낫기를.

 

 

 

 

올 한해도,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지만. 어쨌든, 다들 수고 많았네. 차마, 오늘 같은 기분으로는 내년에도 또 보자고 말할 수 없지만, 아마 다시는 야구 안 볼 것처럼 굴어놓고도 봄이 오면 다시 또 야구를 보게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 강민호보다 더 한심한 건 나인 것 같아. 어째서 늘 이렇게 되풀이 되는 건지.

 

공놀이에 마음을 빼앗기는 건, 타고난 유전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고. 올해도 결국 이렇게 끝나는 시즌을 보내면서, 새삼 다시 생각을 해본다.

 

푸른 잔디. 하얀 공. 달리는 사람들과 그들을 좋아하는 사람들. 그것들이 함께 존재하는 공간은 왜 이렇게 한없이 아름다운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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