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터키 여행기 9] 로즈 밸리의 석양 본문

Before sunrise/메르하바, 나의 친절한 터키

[터키 여행기 9] 로즈 밸리의 석양

dancingufo 2013. 3. 13. 08:47

 

 

 

http://news.kyobobook.co.kr/comma/openColumnView.ink?sntn_id=6627

 

 

크리스마스 아침. 벌룬 투어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조식을 먹은 후 바로 침대 위로 쓰러졌다. 잠깐 뒹굴다가 일어날 생각이었는데 그렇게 누워 있자니 자연스레 잠이 왔다. 그러다 내가 먼저 깬 건지 J가 먼저 깬 건지는 잘 기억 안 나지만, 어쨌든 우리는 일어나야 할 시간보다 늦지 않게 일어날 수 있었다.
 
이 오후, 우리는 카파도키아에서 할 마지막 투어인, 로즈 밸리 투어를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사실 이것은 별로 투어랄 것도 없다. 그냥 가이드와 함께 로즈 밸리라는 곳으로 선셋 포인트를 찾아가면 된다. 길을 잃거나 헤맬 위험만 없다면 가이드와 함께 움직이지 않아도 괜찮은 투어이다. 그런 만큼 가격도 저렴해서, 대부분 그린 투어+벌룬 투어+로즈 밸리 투어를 함께 묶어 패키지로 신청하고 할인을 받는 쪽을 택하는 듯하다.
 
지금 우리는 선셋 포인트를 찾아 로즈 밸리를 오르는 중이다.
 
그런데 이 날은 어찌된 일인지 계속해서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리게 만든다. 시간 맞춰 밖으로 나가도 투어 회사의 사람들은 도통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하여, 우리는 이번에는 또 어찌된 영문인지 알아보기 위해 리셉션으로 올라갔다.
 
언뜻 보면 서른 셋쯤 되어 보이지만, 실은 이제 겨우 스물두 살 된 이 젊은 리셉셔니스트는 우리의 말을 듣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사람들이 우리를 데리러 올 테니 기다리라고 말을 해 우리는 밖으로 나가 또 거리를 서성였다. 그렇게 얼마쯤 지나니 두 명의 남자들이 차를 끌고 나타나 빨리빨리를 외치며 우리를 재촉한다. 늦은 건 자기들인데 왜 우리를 재촉하나 싶더니, 나중에 만난 가이드도 대뜸 우리에게 왜 늦었어?’ 하고 물어본다. 그래서 진행된 대화는 이런 내용.
 
우린 안 늦었어.”
안 늦었다고?”
그래. 너희가 우리를 안 데리러 왔잖아.”
우린 너희 숙소에 전화했는데 투어를 떠날 사람이 없다고 하던데?”
진짜?”
. 그래서 데리러 안 간 거야.”
뭐야. 우린 계속 기다렸는데.”
 
그래서 우리는 잠깐 억울해 했지만, 이내 곧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지, 하고 결론을 내렸다. 어쨌든 그건 모두 지난 일이고 투어는 이렇게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사실 우리가 묵었던 트래블러스 케이브 펜션은 모든 점이 다 마음에 들었지만 일 처리가 그리 깔끔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우리가 카파도키아를 떠나던 날도, 공항으로 가는 셔틀 버스를 제대로 예약해주지 않아서 한바탕 소동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이 젊은 리셉셔니스트는 펜션 주인의 조카라고 들었는데, 삼촌이 휴가를 간 사이 대신 일을 봐주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가끔 리셥션에 올라가보면 늘 노트북 앞에 앉아 게임 삼매경에 빠져 있는 것이, 일 처리가 꼼꼼하지 못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아마 자기가 없는 동안 조카가 이런 식으로 일 처리를 했다는 걸 알면 삼촌이 싫은 소리 몇 마디쯤은 했으리라 
 
겨울이라 그랬겠지만, 우리 일행은 단출했다. 길을 안내해주던 젊은 가이드 한 명과 일본인 커플 한 쌍, 그리고 혼자 온 듯한 젊은 일본 남자 한 명과 나와 J까지 하여 여섯 명이 일행의 전부이다. 어쩌면 그 단출함이 마음에 들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별 특별할 것도 없던 이 로즈 밸리 투어를 내가 매우 마음에 들어 했던 것은 말이다.
 
함께 길을 걷는 사람들은 쾌활했지만, 조용했다. 늘 가장 뒤쪽에 처져 걷는 우리를 재촉하는 법도 없었다. 자신을 대학생이라 소개한 이 젊은 가이드는, 느릿 느릿 걸음을 옮겼고 툭하면 힘들다며 어딘가에 걸터앉아 쉬고는 했다. 그래서 투어라기보다도 그저 먼 산책을 떠난 것 같은 이 오후는 천천히 노을이 내려앉는 카파도키아의 저녁 풍경과도 어쩐지 매우 잘 어울렸다.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는, 게으른 태도가 마음에 들었던 가이드.
 
그렇게 30~40분쯤을 걸으니, 산중턱에 위치한 한 노천 까페가 나타났다. 그곳에서 차 한 잔을 마시는 것이 투어에 포함되어 있어서 우리는 뜨거운 커피나 애플티 같은 것을 한 잔씩 주문했다. J가 마시려고 주문한 이 애플티는 터키인들이 즐겨 마시는 차라고 해서 알게 되었지만, 실은 관광객들이 즐겨 마실 뿐 현지인들은 그리 즐기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아침마다 한 잔씩 타 마시게 된 애플티.
현지인들이 즐기든 그렇지 않든, 이 애플티는 터키에서 마셔야 제 맛이 난다.
 
그린 투어에서도 로즈 밸리 투어에서도, 나는 좀 더 긴 트래킹을 기대했지만 사실 걷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일행들을 만나 정상에 오르기까지는 한 시간 조금 넘게 걸렸을 뿐이다. 도중에 멈춰 서서 사진을 찍고 까페에 앉아 차를 마시고 했던 것을 생각하면 정작 걷는 시간은 한 시간도 채 안 되는 셈이다.
 
차를 다 마시고 일어나, 다시 20분 남짓 걸으니 곧 평평하게 넓은 들판이 나타났다. 바로 여기가 선셋 포인트인가 싶어 물어보니 가이드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조금은 숨이 가쁠 만큼 걸어도 좋았으리라 생각을 하면서 나는 입고 있던 외투와 가방을 내려 놓았다. 그리고 주위를 빙 둘러보자 아직 환한 하늘 위로 하얀 달이 떠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니까 이쪽 하늘에는 아직 지지 않은 해가 있고, 저쪽 하늘에는 갓 모습을 나타낸 달이 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이 마치 서태지의 노래 가사에서처럼, 또는 하루키의 소설에서처럼, 두 개의 달이 떠오르는 순간 같다.
 
날이 밝은 오후.
하늘에는 어느 새 달이 떠올랐다.
 
로즈 밸리에 석양은 천천히 내려 앉았다. 광활하게 펼쳐진 풍경에, 넋을 잃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던 나와 J, 어느 순간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그만두고 조용히 들판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렇게 말없이 앉아 있노라면,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사색의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떠나오기 전, 견딜 수 없다고 느낀 것은 최소한의 상상력마저 고갈되는, 너무나 바쁜 일상이었다.
 
단출한 일행 덕분에, 조용히 석양을 맞이할 수 있었던 우리는 날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간 순간, 절경이 눈 앞에 펼쳐지면 나와 J는 말도 없이 자리에 멈춰 서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가이드는 단 한 번도 빨리 가자며 우리를 재촉하는 법이 없었다. 대신 절벽 앞에 서서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내 곁으로 다가오더니 휙, 하고 나를 밀어버리는 시늉을 한다.
 
괜찮아. 나는 날개가 있어서 날 수 있어.”
하지만 내가 놀라기는커녕 태연한 얼굴로 대답하자, 어이가 없는 모양이다.
 
그럼 어디 한 번 날아봐.”
안 돼. 내가 날 수 있다는 건 비밀이거든. 난 사람들 앞에선 날지 않아.”
 
다시 한 번 태연한 내 대답에, 이번에는 저쯤에 서 있던 J를 돌아본다.
네 친구는, 거짓말쟁이야.”
 
그렇게 나는, 거짓말쟁이가 되어서 로즈 밸리를 내려왔다 
 
로즈 밸리를 걸었던 시간은 두 시간 남짓이다. 그런데도 이 시간은 어쩐지 자꾸 생각이 난다. 서울로 돌아와 사진을 정리하다가, 문득 이 노을을 보기 위해서라면 다시 카파도키아로 돌아가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조용하고 아름답고 너무나 평화로워서 어쩐지 쓸쓸하게마저 느껴지던 시간. 내가 여행에서 가지고 싶어한 것은 실은 이런 쓸쓸함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여전히 로즈 밸리에서의 시간을 그리워 하며 살고 있다.


 

로즈 밸리에 해가 저문다.
더 이상 카파도키아를 기억하지 못하는 날이 오더라도,
이 로즈 밸리에서의 시간만은 계속해서 그리워하며 살아갈 것 같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