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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fore sunrise/스탠드에서 본 풍경

영웅에 대한 예의

dancingufo 2013. 6. 17. 11:58







[글=김민숙] 월드컵은 많은 축구인과 축구팬에게 아주 크고 즐거운 축제입니다. 비록 응원하는 팀의 탈락이라든가, 좋아하는 선수의 부상이라든가 하는 것으로 속상한 경우도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월드컵은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아주 멋진 ‘축제’입니다. 그리고 축제라는 것은 보통 즐거움과 설렘을 동반합니다.

 

하지만 저는 월드컵이 가져오는 즐거움과 설렘의 뒤에서 때로는 아쉬움과 쓸쓸함도 느껴야 했습니다. 대한민국 대표팀의 16강 진출이 좌절된 것도 속상하긴 했지만 사실은 그보다도 더, 이 축제를 마지막으로 즐기고 있는 선수들의 존재가 마음을 흔들었던 탓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선수들은 나이를 먹습니다. 축구라는 것은 지능적인 플레이라든가 뛰어난 전술이 차지하는 비중도 크긴 하지만 무엇보다도 육체의 튼튼함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이를 먹으면서 노쇠해진 육체란 필연적으로 선수들의 훌륭했던 기량을 조금씩 뒷걸음질치게 만듭니다. 예전 같지 않은 체력이 90분의 혈투를 버티지 못하게 만들고, 더 젊고 더 빠른 후배들을 따라잡지 못하게 만들며, 쉽게 아물지 않는 부상이 회복과 재기를 더디게 만듭니다.

 

그래서 더 달리고 싶어도 선수들은 은퇴를 결심하곤 합니다. 35세 전후는 인생의 황금기지만, 축구선수들에겐 축구 인생의 막을 내려야 하는 나이입니다. 얼굴만 보아서는 여전히 젊기만 한데 우리는 그 선수들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더 이상 젊지만은 않은 자신의 육체를 안타까워하는 것을 지켜봐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선수들이, 이제는 이 자리가 마지막이라는 다부진 표정으로 월드컵이라는 세계 축제의 한 가운데 서있습니다.


2002 한일 월드컵이 제게 특별했던 것은, 대한민국이 4강이라는 믿을 수 없는 성과를 남겼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저를 축구팬이 되도록 만들었던 홍명보 선수의 마지막 월드컵이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 때 대한민국 축구의 영광을 바라는 마음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사실은 조금 더 간절하게 홍명보 선수의 개인적인 영광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홍명보 선수는 저에게나 대한민국 대표팀에게나 특별한 선수였고, 이러한 선수의 마지막 월드컵이 부디 아름답게 장식되길 바랐던 것입니다.

 

마지막이라는 것은 이런 간절함을 가지게 만듭니다. 앞으로 더 이상은 기회가 없다는,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가질 수 있는 모든 영광을 가져가주길 바라는, 팬으로서 저는 그런 간절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제 바람은 기대보다 더 화려하게 이루어져서 대한민국 대표팀은 4강에 올랐고, 홍명보 선수는 브론즈 볼을 수상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홍명보 선수에 대해 생각할 때면 더 이상 이 선수의 달리는 모습을 볼 수 없다 해도 아쉬움이나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게 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때의 기억이 저에게 습관처럼 남았나 봅니다. 영웅들의 마지막 월드컵이 반드시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이 심장에 각인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찾아온 이 독일 월드컵에서도 마치 습관처럼, 또는 의무처럼 이제는 늙어버린 영웅들의 마지막 월드컵이 부디 영광스럽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상대팀에 있어도 너무나 훌륭해서 박수를 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네드베드의 영광을 바랐고,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열정적이어서 감탄할 수밖에 없었던 피구의 영광을 바랐습니다. 월드컵 무대를 밟는 것이 마지막일 것 같은 베컴의 영광을 바랐고, 다음 월드컵을 장담할 수 없는 라울 곤잘레스의 영광을 너무나도 바랐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보다도, 수많은 선수들의 그 어떠한 영광보다도, 사실은 지네딘 지단의 영광을 바랐습니다. 펠레나 마라도나를 모르는 저에게 축구 영웅이 어떤 것인지 느끼게 해주었던 바로 그 지네딘 지단의 영광을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루니나 메시의, 리베리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훌륭함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저는 여전히 지단이 보여주었던 마법 같은 축구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단이 늙어간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벌써 몇 년째 레알 마드리드의 팬임을 자처하고 있고, 그 만큼 자주 지단의 플레이를 지켜봐왔으니 말입니다. 단순히 슬럼프에 빠진 것이나 컨디션이 하락한 것이 아니라, 지단의 육체자체가 노쇠해버렸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땀을 흘리고 지쳐하고 주저앉아서 숨을 몰아쉬는 지단의 모습을 보면 그래서 안타깝고 씁쓸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는 지단을 보고 있노라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이 선수가 최고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또 밀려나는 것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여전히 훌륭하지만 더 이상 예전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을, 이제 축구선수로서 걸어갈 길은 내리막길 밖에 없다는 것을 저도 모르게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선수의 영광을 바랐습니다. 소속팀이었던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이미 은퇴경기를 치렀으니 지단의 플레이를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는 이 월드컵이 될 것이었습니다. 이 월드컵에서의 한 경기 한 경기가 지단의 축구를 마무리 지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조용히 있지를 못했습니다.


조별 예선 경기에서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지단에게 성급하게도 ‘늙은 지단’이란 별칭을 선사한 언론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단도 이제 한 물 갔다며 쉽게 웃고 쉽게 떠들었습니다. 그럴수록 더 지단의 영광을 간절하게 바랐던 것이 제 고집 때문이었는지 오기 때문이었는지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는 우리에게 너무나 훌륭한 축구를 보여주었던 이 영웅에게 우리가 좀 더 예의를 갖춰주길 바랐던 것뿐입니다.

 

지단이 늙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늙어도 여전히 훌륭한 이 영웅에게, 마지막까지 예의를 다하고 싶었습니다.

 

프랑스 대표팀은 어렵게 조별 예선을 통과하더니, 제가 대한민국 대표팀만큼이나 좋아하는 스페인 대표팀을 패배에 빠트리고, 환상적인 브라질 대표팀을 단 한 골로 물리쳐 버리고, 두 번째 월드컵 우승을 노리는 스콜라리의 포르투갈 대표팀마저 이겨낸 후에 결국 결승전까지 올랐습니다.

 

지단의 마지막 경기도 하루하루 늦추어져 결국 독일 월드컵의 마지막 날이 이 선수의 마지막 경기가 치러지는 날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지단의 마지막 경기는 대체 언제가 될 것인가, 궁금해 하기 시작했고 마지막까지도 자신의 훌륭함을 증명하기 위해 애쓰는 이 선수를 보며 조금씩 감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지단은 이 월드컵에서 마지막 승자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대회 내내 팀으로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던 이탈리아 대표팀이 결국 월드컵을 차지했고, 지네딘 지단은 자신의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과격한 모습을 보이며 결승전에서 퇴장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프랑스와 지단에게 돌아온 것은 패배였고, 지단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패배와 레드 카드였습니다.

 

그 순간 제가 조금 울고 싶었던 것은 프랑스가 우승을 놓쳤다는 사실보다도, 지단의 마지막이 아름답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혼자 슬퍼하면서 나는 왜 이렇게까지 이 선수의 아름다운 마지막에 집착하는 것일까- 에 대해 생각해야 했습니다.


축구팬들은 쉽게 유망주를 사랑합니다. 싱그럽고 반짝반짝거리는 유망주라는 것은 이름만으로도 너무나 희망에 차 축구팬들이 외면하기 힘든 존재입니다. 그리고 또 축구팬들은 그만큼 쉽게 ‘노장’이라는 수식어를 단 나이 든 선수들을 구식 취급합니다. ‘이제 누구누구는 늙었어’, ‘그만 후배한테 자리를 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누구누구에게는 은퇴를 추천한다’따위의 말들을 축구팬들은 참 쉽게도 합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여러 축구팀들도 오랜 시간 팀을 위해 달렸던 선수를 늙었다는 이유만으로 쫓아내는 데 망설임이 없는 듯 보입니다. 그 동안 팀에서 무엇을 했건 앞으로 팀을 위해 특별한 무엇을 보여줄 수 없다면 지난 시간의 모든 것은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턴가 저는 ‘노장’이라는 말이 무척 슬픈 느낌을 가진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쉽게 사랑받았지만 나중엔 쉽게 버려지는 일이 되풀이되는 동안에는 한국 축구에 영웅이 영웅으로 남기란 너무나 어려울 거란 생각도 해왔습니다.

 

훌륭한 축구를 보여주었던 선수들이 아름다운 마지막을 가지게 되길 바라는 마음은 이렇게 생겨났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늙었다고 하지만, 늙었다고 해서 훌륭하지 않은 건 아니라는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단은 자신의 마지막 경기를 끝까지 소화하지 못하고, 레드 카드를 받은 채 쓸쓸히 퇴장했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 시간 후에 자신이 생애 처음으로 월드컵의 골든볼 수상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접한 우리는 다같이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단에게 표를 던진 이들의 마음속에서 ‘마지막’이란 글자가 발휘했을 힘에 대해 말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부당하다고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왠지, 어쩌면 제기될지 모를 부당함의 가능성을 외면하고서라도 지단을 축하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세계의 많은 축구인들이 이 선수에게 보여준 마지막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이 선수가 우리에게 보여준 아름다운 축구에 대한 감사의 표시 말입니다.


이토록 중요한 상의 수상자를 뽑는 데는 더 엄격한 공정함이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엄격한 공정함으로 늙은 영웅들의 효율성을 재는 일보다 세계의 모든 축구인과 축구팬을 놀라게 하고, 또 즐겁게 하고, 또 때로는 분하게 만들었을 이 영웅에게 예의를 다하는 일에 더 마음이 기웁니다. 우리가 이렇게 영웅에게 예의를 다하는 동안, 영웅이 진짜 영웅으로 남겨질 것 같기 때문입니다.

 

축구팬으로서, 또 지단의 팬으로서, 그 동안 지단의 축구를 볼 수 있어서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부디 마지막 패배와 실수 대신 자신을 우리가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기억하며, 우리가 보여준 이 예의를 즐겁게 받으면서 떠나주길 바랍니다.


글: 김민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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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김민숙 님은 주소지는 서울시이지만 대전 시티즌을 홈팀으로 삼고 있는 축구팬입니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축구를 즐기게 되는 것, 대한민국의 축구가 팬들의 정체성을 너무 쉽게 짓밟지 않는 것, 우리의 리그가 좀 더 튼튼한 토양 위에서 자라게 되는 것, 그리고 김은중이 다시 대전의 유니폼을 입고 달리는 것과 대전 시티즌이 리그 우승컵을 가지게 되는 것을 축구팬으로서의 소망으로 간직하며 축구를 즐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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