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2014년 1월 10일, 본문

아무도 모른다/2014.01 ~ 2014.12

2014년 1월 10일,

dancingufo 2014. 1. 10. 15:33

 

 

서울의 집을 정리하기로 한 이후, 가장 신경이 쓰였던 건 책이다. 아니, 좀 더 제대로 이야기하면 서울의 집을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을 때마다 그 결정을 돌이키게 만든 것이 책이다. 이 도시에서, 나만의 방을 가지게 된 지 9년째. 한 권 두 권 사서 보던 책이 책장을 가득 채우고, 그래서 새로 들여놓은 책장도 다시 가득 채우고, 결국 그 책들을 두 겹 세 겹씩 겹쳐서 꽂아놓게 된 이후, 나는 발목이 잡혀버렸다. 그것들을 지켜야 하니까 떠날 수가 없어진 것이다.  

 

터키 일주를 다녀오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그때 집을 정리하려 했다. 그러지 못했던 건, 고향집에 내 책을 옮겨다 두었다가는 가족들이 빌려간다는 이름으로, 한 권씩 두 권씩 내 책을 가지고 가버릴 거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렇게 사라져버린 내 책들만 해도 큰 책장 하나는 다 채울 것이다.) 그래서 결국, 빈 집을 내버려둔 채 터키에 다녀왔다. 그러니까 이 집은, 나를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책을 위해 필요한 공간이 되어버린 셈이다.

 

무섭다고 생각하게 된 건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나는, 발목을 잡히고 싶지 않았다. 비록 여전히 저 책들을 최대한 잘 보관해둘 수 있는 방법을 찾느라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지만. 그래도 떠나고 싶을 땐 떠나고 싶었다. 결국 ‘엄마, 다른 짐을 다 처분할 테니 내 책만 좀 맡아줘.’라는 허락을 맡은 후 나는 집을 내놓을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책이라는 사실은 슬픈 일이다. 이왕이면, 사람인 쪽이 낫다. 하지만 사람이 아니라면, 책이라도 있는 족이 나은 것 또한 사실이다. 어쨌든 살아서 돌아와야 할 이유는 있는 셈이니까.

 

그래도 고향집의 빈 방이 그렇게 넓지 않아, 최대한 책을 정리할 필요는 있었다. 이곳으로 이사 오며 한 번 대대적으로 정리했던 책들을, 다시 정리하기 시작한 것은 그런 이유였다. 살면서, 한 번 더 들춰볼 일이 없을 것 같은 책 오십여 권을 중고서점에 내다팔았다. 중고서점에도 팔지 않은 책들은 책 모으기 운동을 펼치는 이들에게 보냈다. 예전에도 이렇게 오십여 권을 정리할 때, 실은 마음이 아팠다. 별로 좋게 읽은 책도 아니었고, 그러니 그 책들을 다시 읽을 일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은, 그때 내가 어떤 책들을 정리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으로부터 또 몇 년 후에는, 지금 내가 정리한 책들 역시 기억 속에서 사라지겠지.

 

새삼, 정리한다는 것의 중요함을 느낀 것은 그래서이다. 어떤 기억은, 나를 위해서 차곡차곡 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 어쩔 수 없었던 일들은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치워놓고, 그래도 좋았던 기억들은 한 번쯤 눈에 띄어도 괜찮은 곳에 올려놓고, 잊지 말아야 할 기억들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쌓아놓고.

 

처음엔 책만 보낼까 하다가, 결국 책장까지 함께 고향집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남은 일은, 어떤 책을 가지고 떠나느냐 하는 점이다. 외국에 나갈 때마다 나를 고민에 빠뜨리는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몇 권의 책을 가지고 갈 것이냐. 어떤 책을 가지고 갈 것이냐.

 

한 달간, 스페인과 포르투갈 여행을 떠났을 땐 도리스 레싱의 <황금 노트북>(이 책은 총 3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1, 2권만 가지고 갔다가 낭패를 겪었다. 여행을 시작한 지 2주가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책을 다 읽어버린 것이다. 3권의 내용이 궁금했던 데다가, 더는 읽을거리가 없어진 나는, 친구가 가져왔던 책을 빌려 읽어야 했다. 그것은 내 취향의 책은 아니었지만, 그마저도 감사하여 읽었다.

그렇게 한 번, 읽을거리가 부족해 고생을 했던 나는, 이번에 터키로 떠날 때는 최대한 오래 읽을 수 있는 책들을 챙겼다. 론리플래닛 터키편과 그리스편을 챙긴 데다, 유재원의 <터키, 일만 년의 시간 여행>을 <성경>도 함께 챙겼다. 거기에 여행노트와 다이어리까지 챙긴 덕분에 나는 배낭을 제외하고도 20kg이 넘는 무게를 자랑하는 짐을 끌고 다니느라 고생을 했다. 여행 중간에, 이 책들을 버려버릴까! 라고 몇 번 고민했으나 결국 가지고 갔던 옷들을 버리는 데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3개월이 아니라 최소한 1년이다. 게다가 계속해서 떠돌아다니는 여행이 아니라, 머무는 시간이다. 책이 더 많이 필요할 것 같지만, 다른 짐도 그 만큼 더 필요하다. 그리고 어차피 일 년 동안 읽을 책을 다 가져가지 못할 바에야 ebook을 보는 방법을 택하는 쪽이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여전히 ebook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서너 권의 책만 가져가되, 한 권 당 한 달씩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책들을 가져가기로 해본다. 절반쯤 읽다가 만,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정도라면 적당하겠지. 거기에 <플루타르크 영웅전> 1, 2권을 함께 넣으면 안성맞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강신주의 책 한 권 정도는 함께 넣고 싶은 이 마음은 어떡하나. 게다가 <외딴 방>을 곁에 두지 않고 1년이나 살 수 있을까? 세 번이나 읽었던 책이건만, 하루키의 <먼 북소리>도 가지고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몇 번이나 읽어야지 마음을 먹었으나 아직도 읽지 못한 <총균쇠>나 <생존자>를 가져가는 것도 생각해볼 일이다.

 

떠나는 날까지는, 아직 한 달쯤 시간이 남았으니 결국 내가 어떤 책을 챙기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떠나기 위해서 해결하고 정리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툭하면 책장 앞에 서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이 책들이 무사할 수 있을까, 하는 것과 어떤 책들과 함께 떠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일까, 하는 문제만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내가, 여전히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구분할 줄 모르는 사람 같아서, 조금은 즐거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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