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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른다/2016.01 ~ 2016.12

조금 아프다

dancingufo 2016. 5. 11. 00:11



그, 남자아이를, 처음 인식한 건 플랫폼 안 벤치에서였다. 벤치에 앉아 커피를 홀짝거리며 내가 탈 기차가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을 때, 누군가 내 옆에 앉는 것이 느껴졌다. 중고등학생들이 흔히 입는 검은 트레이닝복을 걸친 얇은 다리가 내 눈에 들어왔다. 어린 남자아이구나, 라고 인식한 건 바로 그 다리 때문이었다.


남자아이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고, 난 혹시 기차가 들어오지는 않나 싶어 고개를 들었다가 그 얼굴을 처음 보았다. 기둥에 기대선 채, 너무나 분명하게, 내 쪽을 보고 있어서, 잠시 멈칫했다. 응? 너, 왜 나를 쳐다보고 있니, 라고만 생각한 건 그 마른 다리처럼 그 얼굴도 그냥 앳되보여서. 그런데도 그 시선이 신경쓰인 건 그런 앳된 얼굴이 나를 보고 있는 게 왠지 좀 이상해서.




기차가 곧 들어왔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고, 내 자리가 있는 객차의 번호로 가섰을 때 다시 그 남자아이를 보았다. 아이는 내 뒤쪽에 서 있었고, 나와 같은 객차로 들어섰고. 그리고,


내가 자리에 앉자, 미리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할아버지에게 쭈뼛거리며 다가와 말을 했다.


"자리 좀 바꿔주실래요?"






그러니까 사실 난, 그때부터 무섭다, 고 생각했다.





뜬금없는 부탁에 할아버지가 흘끗 나를 쳐다보았다. 혹시 아가씨 일행이오? 라고 묻는 듯한 눈빛.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요, 할아버지. 그냥 거기 앉아계셔 주세요.


다행히 할아버지는 얼마간의 점잖은 실랑이 끝에, 남자아이를 다른 자리로 보냈고 나는 바보처럼 그냥 그 일을 잊어버렸다. 그 애는, 기차표를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표도 없이 기차를 타서, 내 옆자리에 앉겠다고 했는데.






남자아이가 다시 나타난 건, 할아버지가 기차에서 내린 직후였다. 내 옆자리가 비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아이는 그 자리로 와서 앉았다. 나는 그애를 쳐다보았고, 그애도 나를 쳐다보았다. 그냥 어린애 같았는데. 나는 다시 무서워졌다. 얘는 대체 여기서 뭘 하려고 그러는 걸까?


테이블 위에 놓인 내 커피잔을 치우고, 내려놓았던 내 테이블을 남자아이가 제멋대로 위로 올려버렸다. 테이블을 올리기 전부터, 그 시선이 계속 내 다리에 와닿아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테이블이 방해라도 된다는 듯 위로 려버렸을 때, 나는 처음으로 애써 무시하고 있던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너, 왜 그러는 거야?"

침묵.

"너 왜 계속 나 따라오는 건데?"

침묵.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그 순간이었다. 기다렸지만, 승무원은 지나가지 않았고 인터폰을 찾아야겠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그리고 아무도 없는 복도로 나섰을 때, 문이 닫히고, 내 뒤로, 나를 따라나온 남자아이가 나타났다.





어릴 때부터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여자로 태어난 건 참 불공평한 일이라고. 어두운 골목에서 남자가 나타나기만 해도, 두려움에 떨어야 한다는 건 너무 화가 나는 일이라고.


 




남자아이가 나를 계속 따라다니고 있다는 건 주위에 앉은 모든 승객들이 알아차렸지만, 누구도 승무원을 불러주거나 내 옆자리에 대신 앉아주거나 남자아이에게 그러지 말라고 타이르진 않았다. 사람들은 흘끗 나를 쳐다보았고, 신경쓰여 하면서도 애써 모르는 체 했고, 복도에서 그 남자아이와 단 둘이 있게 될까봐 인터폰을 찾으러 갈 수도 없게 된 나는, 메신저로 도움을 청했다. 지현아, 나 이상한 사람이 자꾸 나를 따라와.






결국 경찰을 불러준 건 친구였다. 그때는 이미 내가 기차에서 내릴 시간이 단 10분 밖에 남지 않았을 때였다. 나는, 내가 기차에서 내릴 때 그 아이도 따라내릴 거란 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역에 내리자마자 내가 어디로 도움을 청하러 가야 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쯤, 기차 안에 방송이 나왔다.


"손님 중에, OOO 고객님이 계시면 2호실로 와주세요."


하지만 2호실로 갔을 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고, 누구도 와있지 않았고, 내가 먼저 그곳에 도착했고, 그리고 그 남자아이가 따라왔다.






그러니까, 그 남자아이가 뭘 어떻게 했는지는 이야기하지 말자. 그렇게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던 승무원이 뛰어 온 건 내 비명소리를 듣고서였다. 팀장, 이라 불리던 남자가 그 뒤를 따라와서 남자아이를 복도로 데려갔다. 잠깐 무언가 이야기를 하더니 다시 나타난 팀장이 말했다.


"아, 진정하세요. 애가, 자기가 그랬다는 건 인정했고, 왜 그랬냐니까 그냥 누나가 이뻐서 그랬다는데, 아직 고등학생이고 하니까."


응. 아직 고등학생이고 하니까.





그, 남자, 아이가 어디서부터 나를 따라왔는지 나는 모른다. 아마도 플랫폼 안에서부터는 아니었을 것이다. 기차표도 없이 플랫폼 안에 서 있을 이유가 없었을 테니 아마도 역 근처 어디선가부터였겠지. 거기서부터 어떤 사람을 보고, 부산까지 따라온 저 아이가, 나중엔 무엇까지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을 했다. 모든 사람들에겐 시작이 있었을 거야. 모든 끔찍한 일에도 별거 아닌 과거가 있었을 거야.


나를 대신 해, 팀장에게 대든 건 여승무원이었다. 그 여승무원을 야단 치는 팀장에게, 이보세요, 팀장님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아, 여기 이름표 달고 계시네. 라고 물어본 건 나였고. 여승무원은 나를 따라오겠다고 했지만, 그냥 고맙다고 인사만 한 후에 역 내에 있는 경찰소로 향했다. 진술서를 작성하는 데만 두 시간. 그 모든 일이 다 끝나고 집에 도착하니, 경찰서에서 연락을 받은 엄마가, 잠들지 못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난 괜찮아. 엄마. 별일은 없었어. 그냥 이상한 애를 만나서."


응, 그냥 이상한 애를 만나서.





전화를 받은, 남자아이의 부모는 심드렁한 반응을 보인 모양이었다. 전화를 건 경찰이


"처음 있는 일이 아닌가 보죠?"


라고 되물었다. 이런저런 조회를 하던 경찰이, 정신이 좀 이상한 앤가봐? 라고 제 동료에게 말하는 소리도 들렸다.


처벌을 원하세요?

아니요.

합의할 생각은 있으세요?

아니요. 그냥, 치료를 받게 해서 다른 피해자가 안 생겼으면 좋겠어요.






살면서, 성추행을 한 번도 당해보지 않은 여자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사실 상, 거의, 없을 것이다. 너무 빈번하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갑자기 발생하는 일들이라 언제 처음 성추행이란 걸 당했는지, 그런 걸 얼마나 여러 번 당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마도 초등학생 때였을까. 할머니 댁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내 옆자리에 앉은 아저씨가, 갑자기 자신의 성기를 꺼내 보였을 때. 나는 소리도 못 지르고,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자리로 옮겨 앉았다. 중학교 2학년쯤 때 지각하지 않으려고 뛰다시피하며 학교로 향하고 있는데, 마주 걸어오던 아저씨가 갑자기 내 팔을 붙들고는 '너 참 맛있게 생겼다.'라고 말한 것을, 나는 살면서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었다. 대학교 2학년 때, 남자친구와 다투고 화가 나서 집으로 걸어가다가, 누군가 계속 나를 따라오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건 하필이면 아무도 없는 골목길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이미 자정이 넘어 어두컴컴하던 그  거리에서, 웬 아저씨 두 명을 만나지 않았다면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었을지 나는 지금도 모르겠다. 나와 그 남자 말고, 또다른 사람도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그 아저씨들 앞으로 다가갔을 때, 아저씨가 물었다.


"왜요? 누가 자꾸 따라와요?"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자, 안 그래도 그런 것 같다며 집까지 같이 가주겠다고 일어선 아저씨들이 우리집 앞에 도착했을 때 말했다. 저 새끼 저거 정말 미친 놈이네. 우리가 같이 가주는데도 여기 앞까지 따라오네.


인적 드문 거리에서 술취한 남자가 엉덩이를 때리고 도망가는 일이나, 슬쩍 부딪히는 척하며 가슴 언저리를 만지려는 일 따위 그냥 재수 없었다고 기억하고 말 만큼, 한국에서 성추행은 흔하고 또 흔하다. 그러니까 남자들은, 어린애니까 그냥 넘어가요, 라고 말하고, 그러니까 치마를 좀 긴 걸 입고 다녀야..., 라고 말하지만.


여자들은 어떻게들 살고 있는 걸까? 나는 단숨에 이 모든 일을 떠올릴 만큼 참 흔하게도 당해온 일들인데, 왜 내 친구들에게서는 이런 얘기를 한 번도 못 들었을까? 왜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이, 별거 아니고, 응, 사실 별거 아니고, 우리 잘못도 아닌데, 내가 그랬던 것처럼 또 모두 다, 대부분은 그냥 침묵하며 살고 있을까?


왜냐하면, 별일 아니지만, 난 좀 마음이 아팠거든. 우린 좀, 마음이 괴로운 거거든.





다음날, 일어나니 몸이 아팠다. 마음이 아프다고 생각했는데, 그깟 일로 아플 게 뭐야, 싶었는지 대신 몸이 아팠다. 그리고 하루에 한 번쯤, 그 남자애가 생각났다.


어째서 그렇게 방치됐을까. 그애의 부모님은 무얼 하는 사람일까. 만약 그 아이가 그대로 자란다면 나중에 무슨 일이 벌어질까. 나보다, 훨씬 더 끔찍한 일을 당하는 누군가가 생길까?





예전에 내가 알던 사람 중에 자신이 당한 그 모든 성추행의 이유가, 자신의 빼어난 외모 때문이라고 생각하던 여자가 있었다. 그런 그애를 보고, 걔가 늘씬하긴 하지만 그 정도 외모는 아니잖아? 사실 그런 일이 빈번하게 생기는 것도 다 걔 행동에 어느 정도는 문제가 있기 때문인 거라고. 라고 말하던 또 다른 여자도 있었다. 실은 그저, 그 모든 게,


누군가는 누군가보다 물리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약자이기 때문인 거라고. 사람들은 자신이 그래도 된다는 걸, 누군가에게는 그래도 되고 또 누군가에게는 그래선 안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너무나 잘 알아차리기 때문인 거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사실 이제는 내가 맞는 건지도 잘은 모르겠다. 그냥 아직 몸이 좀 아프고, 마음도 조금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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