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2006년 3월 25일, @#$!&*% 본문
이대역
습관처럼 신촌역에서 내려버린다. 어느 역이냐는 반문을 듣고서야 내가 미처 약속 장소를 확인하지 않았음이 생각난다. 좀 짜증도 나고, 내 버릇은 여전하구나- 싶어서 웃음도 난다. 터덜터덜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가 이대역으로 향하니,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은 그 역에는 어쩐지 매우 기분 나쁜 바람이 불고 있다. 그 곳에서 치마를 펄럭이며 지도를 보고 서있는 여자는 불운을 암시하는 존재처럼 느껴지는 것과 같은 식. 최근 들어 이대역은 내게 그런 식으로 기분 나쁜 공간이 되어 있다.
말
나는 누군가의 목소리나 말투에 익숙해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쉽게 사람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모자란 내 청력 탓이라 생각한 적도 있고 남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지 못하는 내 집중력의 문제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두 쪽 다 틀린 말이 아니라해도, 그것이 이유의 전부가 아니며 그렇게 중요한 이유도 아닌 듯 하다. 나는 단지 낯선 말투와 낯선 목소리와 익숙하지 않은 말하는 방식을 어려워하는 것 뿐이다.
낯선 사람이 소리를 내는 방식 말이다. 소리를 크게 밖으로 내거나 입 안에서 웅얼거리는 방식. 목소리가 크거나 작거나 하는 방식. 입모양이 크거나 작거나 하는 방식. 누구의 목소리는 톤이 높고 얇으며 누구의 목소리는 톤이 낮고 굵은가 하는 것. 누구는 많은 표정을 곁들여 이야기하지만 누구는 그저 소리로서만 뜻을 전달하는가 하는 것. 그런 여러가지 방식들 속에서 그 사람의 방식을 알고 받아들이며 이해하게 되는 데까지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간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 있다보면 내가 말 속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것 같아 어지러움을 느끼게 된다.
내가 문자를 좋아하는 이유
아무래도 들어서 이해하고 인식하는 쪽이 약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문자를 좋아하게 된 것은 아닐까- 싶다. 내가 화자가 될 때도 말보단 문자가 편하고, 청자가 되는 경우 역시 그렇다.
기도
문득, 만약 내일 경기에서 지게 되면 어쩌지? 라는 생각이 든다. 이미 져버린 것도 아닌데 그 생각이 너무 생생하게 떠올라서 그럴 때 느끼게 될 고통마저 현실의 크기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럴 가능성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내일 대전에 가는 것이 죽도록 싫어진다. 죽도록, 싫어진다. 그곳까지 가서, 정말로 (지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지기 싫은 그 팀에게 지는 것을 보고, 그 우울함과 괴로움에 뒤범벅이 된 채,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정말로 그곳에 가는 것이 죽도록 싫어진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저녁, 잠이 들었다 깨어나면 '그래도 그 팀에게만은 우리가 이길 수 있을 거야.'라는 망상같은 믿음을 품은 채 꾸역꾸역 대전으로 향하고야 말겠지. 하나님이 계셔, 이런 나도 자식이라 생각하고 아주 조금이라도 어여삐 여기고 계시다면- 제발 내일 경기에서만은 이길 수 있게 해주셨으면 좋겠다. 말도 안 되게, 나는 지금 무려 하나님에게 그런 기도를 하고 있다.
Good News
일을 하고 있는데, 은중이가 시즌 2호골을 넣었다는 문자가 온다. 너무 기뻐서, 활짝 웃어버린다. 카메라는 은을 향해 있지 않지만, 그런 건 그럭저럭 견딜 수 있다. 오늘은 김은중이 멋졌을 게 분명한 골을 보여준 날이니까. 그런 좋은 소식이 내게로 날아온 날이니까.
@#$!&*%
왜 그럴까. 그 사람을 생각하니까, 이런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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