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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1월 17일, 변함없이 간바레 본문

아무도 모른다/2006.01 ~ 2006.12

2006년 11월 17일, 변함없이 간바레

dancingufo 2006. 11. 17. 20:13

01.

우리 사무실의 기본 정신은 방목이다. 신입이건 수습이건 처음 맡아본 일이건 배울 사람이 있건 없건, 무조건 각자 알아서 해야 한다. 지난 석달 동안 내가 확실하게 깨달은 것은 우리 사무실의 기본 정신이 방목이란 사실 하나 뿐이다. 사장은 자기가 뭘 잘못했길래 사람들이 자꾸만 일을 그만두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봤을 땐 그런 기본 정신이 문제다. 그것이 가장 사원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02,

사람이 잘난 탓인지 사장은 끊임없이 일을 가지고 온다. 하지만 석달 전에, 경력자들이 우루루루 사무실을 빠져나간 후 그 업무를 대신할 사람들도 없는데 업무량이 여전히 많다는 건 그다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새로 들어온 신입들은 대체 이 일들을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 건지 물어볼 사람 한 명 없이 지난 석달을 버텼다. 그 와중에 세 사람이 더 회사를 관두었다. 툭하면 신경질에 잔소리를 퍼붓던 과장도 사람 관두는 것에 놀랐는지 요즘은 웬만해선 화도 안 낸다. 하여, 실수를 해도 돌아오는 잔소리에 벌벌 떨 필요는 없어졌지만- 그렇다고 이 일들을 처리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럭저럭 괜찮게 해내갈 수 있다고 생각해왔던 나도, 요즘은 내 앞으로 뚝뚝 떨어지는 일에 겁부터 난다. 할 수 있다, 라고 심호흡을 해봐도 사실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분명히 내 능력 밖의 일이다.


02.

그렇다. 이건 내 능력밖의 일이다. 그것을 인정하기가 힘들었지만 사실은, 처음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 번 해보자고 덤볐던 건, 어차피 머리 달린 사람이 하는 일이면 내가 못할 건 또 뭐겠냐고 생각했던 탓이다. 지나친 자신감이 문제다. 또한 필요없는 자신감이 늘 문제다.


03.

하지만 이제와서 내가 아무리 못하겠다고 하고, 겁을 내고, 한숨을 쉬고, 답답해해도, 이건 내 앞에서 다른 사람의 앞으로 옮겨갈 수 있는 성질의 일이 아니다. 어떻게 되든 내가 해야한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기 때문에, 이건 내 능력밖의 일이라는 걸 인정해도 달라질 게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두통이 일기 시작했다. 힘들어졌다. 나는 이 일을 잘 마무리해나갈 자신을 이미 잃었다.


04.

그래, 자신이 없다. 자신감을 가지고 일을 하라지만 이번엔 정말 자신이 없다. 시작부터 어려웠고 지금도 너무 어렵다. 그런데 시한은 촉박하고 일은 너무 많아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여, 멍하니 넋을 놓고 앉아있자니 이건 어리광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알아서 척척 해내고 싶었다. 그런 걸 할 수 있는 인간이 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못하겠다고 징징대고 어렵다고 주저앉아 어떻게 하면 이 일을 피해갈 수 있을까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는 내가 여기에 있다. 이런 나를 마주치는 일이 싫다. 하지만 이런 내가 진심으로 나다워 보여서, 조금 마음이 아프다.   


05.

피해가고 싶다. 그냥 주저앉아 있고 싶다. 하지만, 다시 생각한다. 조금 더 부지런해지기로 하자. 조금 더 튼튼해지기로 하자.

그래. 잠은 자지 않아도 좋다. 그리고 잠깐동안은 나 자신에게 조금 더 엄격해져야 한다. 이 두 가지를 지켜나가면 최소한 시작도 하지 않고 울기만 하는 나는 마주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두 가지 규칙이다. 시간은 쪼개서 마지막 한 조각까지 빠짐없이 사용한다. 내 어리광이나 훌쩍거림에는 절대로 귀를 기울여주지 않는다. 이 규칙을 잊지 말고 되뇌이면서 잘, 잘, 기억해두도록 한다.


06.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그 모든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자신감을 잃지 않아- 결국 눈부신 날개로 날기 시작한 사람이 있다. 나는 그 날개를 생각하면서, 나 자신도 얼마쯤은 힘을 내서 가기로 한다. 지금은 분명히 힘이 들고 그래서 조금은 울고 싶지만, 그래도 변함없이, 간바레다. 김민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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