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R.U Ready? 본문

Before sunrise/스탠드에서 본 풍경

R.U Ready?

dancingufo 2013. 6. 17. 02:04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는 말도 있죠. 즉 시작이 매우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무슨 일을 하든 가능한 한 최대한 즐겁고 행복한 시작을 맞게 되길 바라죠. 그렇기 때문에 축구팬들은 (모든 경기에서 그렇긴 하겠지만, 평소보다 좀 더 강하게) 개막전에서 승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그 시즌이 어쩐지 처음의 그 승리처럼 즐겁고 행복할 거란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는 축구팬입니다. 그래서 이왕이면 챔피언이란 이름 같은 것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팀, 이왕이면 대전과의 전적에서 뒤지는 팀, 이왕이면 올 시즌 전력이 조금은 약해진 팀, 그런 팀이 개막전의 상대가 되길 바라죠. 또 어떠 어떠한 팀은 제 마음 속에서 절대로 개막전에서 만나고 싶지 않은 팀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바로 ‘성남’과 같은 팀 말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2006시즌, 제가 응원하고 있는 대전 시티즌은 개막일인 3월 12일에 성남과 경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성남은 정말 제가 개막전 상대로서 바랐던 팀과는 가장 어울리지 않는 최악의 상대였습니다. 대전은 성남만 만나면 두 골차 이상으로 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 왔고, 가끔 5-1이라는 멋진 스코어로 승리한 적도 있긴 하지만 불행히도 전 그 당시 경기장에 없었고, 하여 지난 4시즌 동안 전 한 번도 대전이 성남에게 승리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또한 성남은 K리그에서 여섯 번이나 정상을 차지했던, 우리의 리그에서는 ‘챔피언’이란 이름과 가장 잘 어울리는 팀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비록 김도훈이라는 걸출한 스트라이커의 빈 자리가 있긴 하지만 여전히 모따와 두두라는 두 명의 뛰어난 스트라이커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국가 대표팀에서도 좋은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 김상식과 김영철, 장학영이 성남에서 뛰고 있고 몇 년 전부터 꾸준하게 제가 그 능력에 믿음을 보내고 있는 조병국도 있으며 올해는 김용대를 영입하였으니 골문의 부실함을 노려볼 틈도 없습니다. 박진섭은 영리하고 부지런하며 히카르도는 빠르고 재기발랄합니다. 이렇게 어느 포지션에든 든든한 실력자들을 세워두고 있으니 저는 이 팀의 약점 따윈 아무리 고민해보았자 분명히 찾아낼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고 말았죠. 



아마 그래서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점점 길어지는 오프 시즌에 축구팬들이 조금씩 몸살을 앓기 시작하고 푸른 잔디에 대한 향수병이 깊어져 다들 새로운 시즌이 시작되기만을 바라고 있을 때도, 저는 가슴 설레어 하며 이 시즌의 시작을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나의 팀은, 나의 대전 시티즌은 지난 오프 시즌에 팀의 굳건한 기둥이었던 창단 멤버를 내보내고 몇 년 사이 꽤 정들었던 우리의 선수들과 안녕하고 고작 1년이었지만 저로 하여금 특별히 미래를 기대하게끔 만들었던 외국인 스트라이커를 다른 팀에 뺏겨버렸습니다. 시즌이 시작되고 있지만 허전하게 보이는 포지션은 미처 다 채워지지 않았고, 잔뜩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던 시민주는 목표액을 절반도 채우지 못했으며, 선수단의 규모는 여전히 서른 명도 채 안 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더욱 그랬습니다. 전 들뜰 수 없었고 웃을 수 없었으며 설레어 할 수도 없었습니다. 전 정말 우리가 이 시즌을 즐겁고 행복하게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조금도 기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이 시즌의 첫 경기는 결국 현실이 되어 제게 닥쳐왔습니다. 저는 이 경기를 전혀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우리가 성남을 이길 리가 없잖아’, ‘3:0으로만 지지 않는다면 일단 난 참을 순 있을 거야.’, ‘지더라도 제발 한 골만 먹고 졌으면 좋겠어.’ 따위의 말들을 늘어놓으며 경기장을 찾았죠. 



바짝 곁으로 봄이 다가온 줄 알았지만, 시즌의 첫 경기부터 패배해야 하는 대전의 슬픔을 예고하는 것인지 경기장 안은 매우 추웠습니다. 그 추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퍼플 아레나 에는 꽤 많은 관중들이 모여 있더군요. 그곳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온전히 대전의 승리를 염원하며 그 자리에 앉아있을 거란 생각을 하자 어쩐지 조금 서글퍼졌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시즌의 첫 날부터 패배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퍼플 아레나에 들어선 후에도 전 정말이지 단 1%도 우리 쪽에 승리를 점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렇게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이 휘슬이 울리고, 공이 선수의 발끝을 떠나고, 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제 기분과는 무관하게 달리는 우리 선수들은 마치 갓 피어난 진달래처럼 어여쁜 색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죠. 바로 그 선수들을 좋아하고 응원하는 우리는 손에 손에 들었던 하얀색 휴지폭탄을 힘차게 터트렸습니다. S석을 제외한 3면에서 동시에 하얀 눈꽃 같은 것이 순식간에 피어났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그 하얀 꽃이 실제로 팡팡- 소리를 내며 피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지요. 



그리고, 그리고, 말입니다. 



문득, 어쩌면 우리가 승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 이상하게도 그 순간, 어쩌면 우리가 승리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그 두려운 기대감이 제 무겁고 어둡던 심장 속에서 비죽이 고개를 내밀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달리고 있는 이관우의 등을 보자 비죽거리던 제 입 끝에 웃음이 걸렸습니다. 달리고 있는 주승진을 보자 잔뜩 찌푸려있던 제 얼굴이 편안하게 풀렸습니다. 전광판으로 검은 양복을 입고 서 계신 우리 감독님이 비추어지자 세 골 먹고 지는 것과 한 골 먹고 지는 것에 대한 생각 따윈 말끔히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승리에 대한 기대감은 마법처럼 제 심장에서 싹이 텄습니다. 저는 그제야 내 팀의 승리를 믿고 바라는 온전한 축구팬으로 돌아왔지요. 



예상했던 것처럼 성남을 상대하는 일이란 절대로 쉽지가 않았습니다. 내 팀의 미드필더들에게 중원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달리는 김상식은 어찌나 끈질긴지 진저리가 쳐졌죠. 조병국은 여전히 튼튼하고 성실하여 그 벽을 어떻게 해야 뚫을 수 있는지 쉬이 감이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골문을 향해 달리는 모따는 어찌나 빠른지 질끈- 하고 눈을 감고 싶었습니다. 내 팀의 선수들도 열심히 달리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우리가 승리를 챙기기엔 성남은 변함없이 강한 팀이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28분 만에 안타까운 선제골을 내주고, 남은 시간 동안 단 하나의 골도 만들어내지 못하여 그 골이 이 경기의 결승골이 되는 것을 그저 지켜만 봐야 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게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두 팔로, 두 다리로 급속하게 퍼져 나가더군요. 하지만 저는 곧 그 무력감에 전복 당하는 대신 다시 한 번 잔디를 밟고 서있는 내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내주기로 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려주었거든요. 저는 시작도 하기 전부터 상대의 명성과 화려함에 짓눌려 불평하고 투정하며 이 순간을 비켜갈 생각만 했는데, 그 사람들은 이 강한 상대 앞에서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거든요. 그런 그 사람들 때문에 조금, 아주 조금, 흐뭇해졌습니다. 경기에 질 때마다 어깨를 축 늘어뜨려 저를 속상하게 만들었던 그 사람들이, 이번엔 경기에 지고서도 패배자처럼 고개를 떨구지 않아서- 저는 결국 웃어버렸습니다. 



네, 생각했던 것처럼 개막전에서 져버렸네요. 또 다시 성남에게 패해버렸습니다. 처음 호흡을 맞춰본 공격수들은 미들에서 잘 만들어준 기회들을 단 하나도 골로 만들어내지 못했고, 새로운 얼굴들은 기존의 얼굴들처럼 말끔하게 팀 속으로 잘 녹아 들지 못했습니다. 열심히들 달려주었지만 여전히 우리 팀은 강한 팀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어쩐지 별로 괴롭지가 않습니다. 사실 경기 결과가 어찌되든 그건 그다지 큰 상관이 없다는 걸 저는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언제고 단 한 번 대전 시티즌이 강해서 이 팀을 좋아한 적은 없었다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승리를 원하고 승리가 기쁘고 승리하지 못해서 괴로울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승리 때문에 이 팀을 선택한 건 아니니까요. 승리가 이 팀과 그다지 돈독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진작 알아챘지만 그럼에도 제가 이 팀을 떠나지 않은 것이 ‘어쩔 수 없어서’인 것만도 아니니까요. 



우리는 이 시즌을 보내는 동안, 또 여러 번 패하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몇 경기가 지나는 동안 단 하나의 골도 터트리지 못할 수도 있죠. 때로는 다 이겨놓은 경기를 비기거나 질 수도 있고, 또 어쩌면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상대에게 패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끼고 소중히 하는 선수가 아플 수도 있고, 납득할 수 없는 심판의 판정으로 패배를 온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의 시즌에는 그렇게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전 그 숱한 일들이 일어날까 무섭고 두려워서 이 시즌이 시작되는 것을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내가 내 팀이 주는 즐거움을 누리기로 한 이상, 이 팀이 주는 고통도 감수해야 하겠지요. 올 시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오래 괴로워하거나 지나치게 슬퍼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마신 숨을 내뱉으면- 저는 이제야 이 시즌으로 뛰어들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더 이상 두려운 마음을 접고 우리들의 이 시즌을 마음껏 즐길 것입니다. 



사진제공: 대전 시티즌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