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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fore sunrise/스탠드에서 본 풍경

패배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dancingufo 2013. 6. 17. 11:54



[글=김민숙] 어떤 스포츠에선 가장 빨리 달린 사람이 승리하고, 또 어떤 스포츠에선 가장 높이 뛰어오른 사람이 승리하고, 또 어떤 스포츠에선 제한된 시간 안에 가장 많은 골을 성공시킨 쪽이 승리합니다.

 

스포츠란 것은 저마다 승부를 결정짓는 방식이 다 다르기 때문에 승리를 차지하게 하는 부분도 다 다르죠. 그렇지만 그 방식이 어떤 것이든, 그것에 참여한 사람들 사이에서 승부를 결정지으려고 하는 것은 스포츠의 본질적인 속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경기가 끝나고 나면 언제나 승리와 패배가 생겨나고, 그에 따른 승자와 패자가 생겨나는 법입니다.


경기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그리고 그들을 응원한 또 다른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들 쪽에 승리가 있기를 바라며 바로 자신들이 승자가 되길 원합니다. 사실 승리라는 것은 경기에 참여하고 누리는 사람들의 최종 목적이자 가장 절실하고 의미 있는 무엇일지도 모릅니다.

 

저 역시 그 동안 대전 시티즌이라는 프로 축구팀을 응원하면서 가장 절실하게 원했던 것은 그들과 내가 가지는 우리의 승리였던 것 같습니다. 승리라는 것은 너무나 눈부시고 환상적이었기에, 한 번 본 그 승리의 맛 때문에라도 절대로 내 팀의 경기를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때로는 견디기 힘든 패배도 있었지만 그 모든 패배를 잊고 다시 내 팀의 선수들이 달리고 있는 경기장으로 뛰어가게 만든 것은 그 동안 내가 맛본 승리의 힘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우리는 모두 승리를 사랑합니다. 저도 너무나 승리를 사랑합니다.


그렇지만 언제나, 승리의 옆에는 패배가 있습니다. 어느 한쪽이 승리하면 다른 한쪽은 패배할 수밖에 없는 것 역시 스포츠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스포츠 팬들은 승리를 원하는 만큼이나 패배를 두려워합니다. 우리 중 그 어느 누구도 패배를 사랑하지 않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패배는 언제나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늘 우리의 곁에 있으며, 언제든 우리에게 밀어닥치기 위해 시시 틈틈 우리를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패배가 없다면 승리도 누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패배를 멀리 내쫓아버릴 순 없습니다. 내가 승리하려면 다른 누군가는 패배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 바로 스포츠입니다. 물론 누구도 다른 누군가가 승리하는 동안 자신이 패배하는 것을 원하진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어떤 팀이라 해도 모든 경기에서 100% 승리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패배를 만나지 않는 스포츠란 없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스포츠를 좋아하고, 어떤 스포츠팀을 응원하고 있다면 패배를 만나기 위한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팬이나 지지자란 이름으로 내가 응원하고 있는 팀의 승리를 같이 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함께 웃고 박수치고 즐거워하는 일이란 괴롭지도 않고 고통스럽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잘 하고 있는 팀을 칭찬하거나 더 잘하라고 환호해주는 일이란 누구나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습니다. 진짜 문제는 내 팀의 패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겨내고, 지켜보느냐 하는 것에 있습니다.


축구팬으로서 가장 견디기 힘든 시간은 아마도 내 팀의 ‘실패한 시즌’일 것입니다. 계속되는 패배와 선수들의 부상이 들끓는 시즌 말입니다. 몇 번의 경기가 지나가도 승리를 만날 수 없는 시즌이란 것이 있습니다. 저에게도 그런 시즌이 있었고, 가끔 돌이켜 그 시즌을 떠올리면 내가 대체 그 시간들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을까- 궁금해지곤 합니다.


2002시즌에 대전 시티즌은 스물일곱 번의 경기에서 단 한 번의 승리를 챙겼습니다. 그 외에 모든 경기는 비기거나 졌지요. 혹시 내가 없는 경기에서 두 번째 승리가 있을까봐 경기장에 가지 못하는 날에는 늘 불안에 떨어야 했지만 막상 경기장을 찾은 날엔 답답함과 속상함으로 뒤범벅이 된 채 서울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마지막 경기에서까지 결국 대전은 두 번째 승리를 챙기지 못했고, 그 시즌은 그렇게 한 번의 승리만을 우리에게 남긴 채 끝이 났습니다.


그렇지만 그토록 괴로웠던 시즌에 대한 보답인 것인지, 다음 해인 2003 시즌에 대전은 처음으로 승리와 영광이라는 것을 마음껏 누려보았습니다. 처음으로 중위권에 팀의 이름을 올려놓은 채 시즌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97년 창단 이래 단 한번을 제외하고는 모든 정규리그에서 꼴찌를 맡았던 대전입니다. 그나마 98시즌에도 10개 팀 중 9위를 차지했지만, 그것이 이 팀의 최고 성적이었던 셈입니다.


그랬던 팀이 2003년엔 자그마치 열아홉 번이나 승리를 챙겼습니다. 가장 많은 축구팬들을 홈 경기장으로 불러들였고 홈에서의 승률도 12개 팀 중 1위를 기록했지요. 그 시즌은 길고도 길었던 실패한 시즌 끝에 돌아온 즐거운 시즌이었다고 기억합니다. 사실 마지막 순위는 고작 6위였을 뿐이지만 그런 순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 해에 우리는 열아홉 번이나 승리했고 그렇게 많은 승리를 경험하면서 지난 패배들을 참아낸 우리 자신을 많이 기특해할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힘들었어. 그렇지만 참 잘 이겨냈다' 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도 우리가 이렇게 잘 해낼 수도 있다고 믿지 않았겠지만, 우리 자신도 사실은 100% 믿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용케 이 팀을 외면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팀이 그렇게 힘들어할 때, 그렇게 휘청대고 허우적댈 때, 그래도 그 뒤에 이 팀을 믿고 있었던 것은 우리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를 찾아오고야만 이 승리가 팀과 선수들의 것일 뿐만 아니라 정말로 나의 것이기도 하다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길고 긴 실패한 시즌을 버텨낸 것은 팀과 선수들일 뿐만 아니라 우리기도 했으니까 말입니다.


달고도 달았습니다. 그 많은 패배를 버텨낸 후에 맛본 승리라는 것은 말입니다.


아마도 그때부터 저는 얼마쯤 패배에 너그러운 팬이 된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패배를 싫어하는 것은 변함없지만, 내 팀의 패배를 버텨낼 힘이 없다면 내 팀의 승리를 마음껏 즐길 권리도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대전 시티즌이 오랫동안 약팀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좀 더 쉽게 패배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계속해서 우승후보에 머물고, 시작부터 승리에 익숙했으며, 대부분의 시즌을 승승장구하며 보내온 팀의 팬이라면 물밀 듯이 밀려오는 패배를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벌써 몇 번째 패배라거나, 우리가 꼴찌라거나, 하는 그런 것들이 진심으로 당황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 동안 많은 성공한 시즌을 보내왔을수록, 더 오래 더 굳건하게 더 믿음직스럽게 팀의 실패한 시즌을 지켜봐야 하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합니다.


축구팬들은 단순히 팀의 경기를 소비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팀과 나를 동일시하기 때문에 내 팀이 승리했을 때 ‘우리는 승리했다’라고 말합니다. 사실상 팀이 일궈낸 승리긴 하지만 큰 소리와 박수와 노래와 진심어린 마음으로 응원한 우리의 힘도 승리에 한 몫 했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팀이나 선수들과 함께 마음껏 승리를 자축합니다. 단순히 팀을 축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자신을, 스스로를 축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팀의 패배도 ‘우리의 패배’여야 합니다. 승리를 함께 즐겼다면 패배도 함께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괴로운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승리를 즐길 힘이 있었다면 패배를 버텨낼 힘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패배에 대처하는 축구팬들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올 시즌 그 동안과는 달리 유난스레 많은 패배를 겪어 힘들어하는 팀들이 있습니다. 패배가 익숙하지 않아서 괴로워 보입니다. 감독 퇴진이니 서포팅 거부니 내부에서는 이런 저런 얘기도 많은 듯 합니다. 저야 제3자에 지나지 않으므로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는 믿고 기다려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팀이라 해도 모든 시즌을 성공적으로 보낼 순 없는 법입니다. 천하의 레알 마드리드도 벌써 3시즌 째 어떤 대회에서도 우승컵을 차지하지 못한 채 무관의 제왕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아무리 강한 전력을 갖추고 있다 해도 언제든 패배를 만날 수 있는 것이 바로 축구입니다. 축구란 것이 본래 그런 것일진대, 각 팀의 수준이 비교적 평준화되어 있는 K리그에서는 지난 해 우승팀이 다음 해 꼴찌 하는 정도야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사실 K리그의 성남 일화만 해도 그 동안 정규리그에서만 여섯 번이나 우승한 경험이 있지만, 98시즌엔 10개팀 중 최하위를 차지했습니다. 그 후로 성남이 다시 강한 팀으로 거듭나고, 또 다시 리그 3연패를 이뤄낼 수 있었던 것은 그 실패한 시즌을 잘 이겨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매해 실패한 시즌을 보내는 팀의 팬들은 존재할 수밖에 없고, 그럼에도 그 시즌을 이겨내게 해주는 힘이란 그런 시간들을 특별한 추억쯤으로 기억하게 만드는 성공한 시즌이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모든 시즌을 성공적으로 보내는 팀이 없듯이, 모든 시즌을 실패하는 팀도 없으니 말입니다.


저는 미약하게나마 팀과 선수가 더 많은 힘을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팬의 힘을 믿습니다. 같이 뛰지는 못하지만 마음이 한 곳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의 중요함을 믿습니다. 그런 만큼 더더욱, 팀과 선수가 힘이 들 때 바로 그런 팬들의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잘하고 있을 때 들려오는 박수 소리보다도 힘들고 휘청댈 때, 그만 주저앉고 싶을 때 들려오는 박수소리가 더 절실할 테니까요.


우리는 승리가 주는 카타르시스를 알고 있기 때문에 늘 이토록 간절하게 승리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승리를 즐길 권리는 오늘의 패배를 이겨내고 다시 승리할 것임을 믿고 기다린 사람들에게만 돌아갈 것입니다.


패배란 것은 누구에게나 꺼림칙하고 회피하고 싶은 것이겠지만, 어차피 만나야 하는 것이라면 그 패배를 정면으로 마주보기로 합니다. 누구를 탓하기 보다는 다시 같이 힘낼 수 있도록 애쓰기로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승리를 만나게 되었을 때는 마음껏 이 패배를 웃어넘기려고 합니다.


때로는 우리 모두가 조금 더 올바르게 패배에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어차피 패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면 승리도 온전하게 누릴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글: 김민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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