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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fore sunrise/스탠드에서 본 풍경

내가 사랑한 대전

dancingufo 2013. 6. 17. 11:59





[글=김민숙] 축구는 정체성입니다. 축구팬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저도 축구팬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들으면서 저는 이 말이 참 멋지다고 생각했고 또 옳은 명제라고도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이 말의 뜻을 완전하게 이해했던 것은 아닙니다.

 

한동안 저는 대전이란 팀이 대체 무엇일까에 대해서 고민해야 했습니다. 축구가 정체성이라면, 100% 확실하게 저의 정체성은 대전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전이 대체 무엇인지 정확하게 갈피가 잡히지 않았습니다. 대전 시티즌이란 이름 아래 달리고 있는 선수들인지, 그 선수들과 코칭스태프의 모임인 것인지, 구단 프런트도 그에 속하는 것인지, 계약이 종료되면 아무렇지 않게 떠나버리는 선수들이 과연 나의 정체성일 수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며칠 전엔 이관우 선수가 대전을 떠났습니다. 저의 경우 딱히 이관우 선수의 팬을 자처할 것은 아니나, 그래도 이 선수 때문에 대전을 알게 되었고 대전을 좋아하게 되었으니 아쉬운 마음이 컸습니다. 팬으로서 선수를 떠나보낸다는 것은 언제나 마음 아픈 일입니다. 선수들은 당연히 더 좋은 조건의 팀으로 옮겨가길 바란다는 것을 알면서도, 팬들은 늘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가 언제까지고 자신들과 함께 하길 바랍니다.


하지만 떠나는 선수란, 팬이 붙잡을 수는 없는 존재입니다. 지난 시간 동안 그렇게 환호하고, 그렇게 아꼈던 선수들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들은 떠나버립니다. 아쉬웠다고 말하고, 고마웠다고 말하지만 우리와 함께 남아주진 않습니다. 그래서 쓸쓸했습니다.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토요일에는 그런 쓸쓸한 마음을 가지고 대전으로 향했습니다. 경기가 있는 날이라 습관처럼 대전으로 향하긴 했지만 승리에 대한 다짐, 경기에 대한 설렘, 우리 선수들을 본다는 기쁨 같은 건 별로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대체 대전 시티즌 따위가 다 뭐람. 그런 생각도 했던 것 같습니다. 열정이나 충성을 바치기가 싫어졌던 것입니다. 그래봤자 어차피 모두 다 다 떠나버릴 거라고 생각했으니 말입니다.


도착한 경기장엔 우리 팀의 유니폼을 입고 N석을 지키고 있는 퍼플 크루가 있었습니다. W석을 꽉 채워준 대전의 팬들이 있었습니다. 시민들에게 매치 데이를 나누어주느라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좀 더 좋은 위치에서 경기를 보기 위해 자리를 찾고 있는 사람들. 대전을 찾으면 늘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지난 토요일에도 바로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갑자기 몰려드는 편안함과 친숙함 때문에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곳이 나의 자리구나’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탓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관우 선수가 없는 대전에 대해 염려의 시선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대전 선수들은 이관우 선수의 빈자리가 느껴지지도 않을 만큼 좋은 경기를 보여주었습니다. 4-2라는 기분 좋은 스코어로 승리했고, 많은 골들을 보여주었고, 그래서 경기장을 찾은 대전팬들을 기쁘게 해주었습니다.


좋은 경기를 했기 때문에 경기를 끝낸 선수들의 얼굴에도 웃음이 가득했습니다. 감독님이 웃고 계셨고, 라커룸으로 들어가는 선수들의 어깨를 툭툭 쳐주기도 하셨습니다. 그런 감독님과 선수들을 향해 대전팬들은 경기가 끝난 후에도 그 자리에 남아 박수를 보내고 환호성을 들려주었습니다. 대전의 모든 것이, 그렇게 웃고 있었습니다.


네. 대전의 모든 것이 웃고 있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저는, 대전이란 것이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아졌습니다.


다 이해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팀을 떠나는 선수들이 미웠습니다. 선수를 붙잡지 못하는 구단이 싫으면서도, 구단이 비난받는 것 또한 싫었습니다. 대전의 최윤겸 감독님을 너무나 좋아하고 있지만, 이 분도 언젠가는 떠나고 말 것이란 생각이 들어 두려웠습니다. 젊고 패기 넘치는 선수들이 잘해주길 바라고 있지만, 그렇게 잘한 후에 또 다른 팀에게 뺏겨버리는 것은 아닌가 조바심이 났습니다.


그런 엉망진창이 된 마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대전은 대체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해야 했습니다. 내가 이토록 좋아하고 있는 것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지난 토요일 경기를 보고 돌아오면서, 저는 대전이 무엇인지 희미하게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선수들입니다. 우리의 유니폼을 입고 우리의 승리를 위해 달리고 있는 그 선수들입니다. 그것은 감독님과 여러 스태프 분들입니다. 선수들을 격려하고, 지도하고, 좋은 경기를 할 수 있게끔, 또 더 좋은 선수가 될 수 있게끔 이끌어주시는 감독님과 스태프 분들입니다. 그것은 대전의 팬들입니다. 선수들이 힘을 내도록 하기 위해 끊임없이 박수치고 노래하고, 혹 승리를 가져오지 못하더라도 그들을 질타하는 대신 그래도 장하다고 이야기해주는 대전의 팬들입니다.


그것은 퍼플 아레나입니다. 세상이 어두워지면 푸르른 빛을 발하면서 언제나 그 자리에 아름답게 있어주는 퍼플 아레나입니다. 그것은 나의 친구들입니다. 함께 대전을 좋아하고, 함께 대전의 승리를 축하하며, 함께 대전의 패배를 아파하는 친구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나입니다. 대전을 보기 위해서 매번 기차나 버스를 타고 그곳까지 내려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나입니다. 상대팀 선수가 심한 태클이라도 해오면 창피한 줄도 모르고 비난을 퍼붓는 나입니다. 우리 선수가 골을 넣어주면 목이 아플 때까지 그 선수의 이름을 불러대는 나입니다. 가장 좋아하던 선수를 떠나보냈고 가장 대전에 남아주길 바랐던 선수도 떠나보냈지만 여전히 대전만이 나의 팀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나입니다.


그 모든 것이 대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어떤 한두 가지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도 말입니다.


때때로, 대전이 아닌 다른 팀들 간의 경기를 보기 위해 축구장을 찾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꼭 내가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있는 것처럼 낯이 설고 어색하고 결국엔 외로워져버립니다. 부산에서 태어났고, 서울에서 살고 있지만 그 도시의 팀들은 내게 어떤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대전만이 나에게 한없는 평화를 주고 미칠 것 같은 기쁨을 주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주고 바로 ‘나의 것’이라는 친밀감을 남깁니다.


멋진 승리를 보고 돌아오면서, 오랜만에 골을 넣어준 우리 팀의 젊은 선수들을 생각하면서, 발목을 접질리었다는 어느 선수의 안부를 걱정하면서, 생각했습니다. 이제 누가 다시 이 팀을 떠나도 그 쓸쓸함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입니다.


선수들은 끊임없이 떠나지만, 또 새로운 선수들이 우리를 찾아올 것입니다. 감독님도 언젠가는 떠나시겠지만, 함께 하는 동안엔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대전을 떠나게 되겠지만 그래도, 그 후로 오랫동안에도 ‘대전 시티즌’은 계속해서 남아있을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대전은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있을 것입니다.


대전 시티즌의 팬이 된 지 이제 5년. 처음에는 막연하게 멋있게만 들렸던 ‘축구는 정체성이다’라는 말을 이제는 이해합니다. 그것은 어느 누가 멋들어진 설명을 해주었기 때문도 아니고, 그것이 정답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저 나 스스로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확실한 정체성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축구팬들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카타르시스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니 저는, 이러한 최고의 카타르시스를 안겨준 대전을 언제나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글: 김민숙

 

사진제공=김장헌, 대전 시티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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