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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cingufo 2006. 8. 14. 01:17




 소년이 소녀를 처음 만난 건, 소년이 ‘순정’이란 단어에 대해서 처음 배울 때이다. 순정이란 것이 줄창, 평생, 죽을 때까지 한 여자만 뼛골 빠지게 사랑하는 것이란 걸 아버지에게서 배우는 순간 소년의 눈앞에 소녀가 나타난다. 노란 우비를 입고 야무진 표정으로 힘찬 발걸음을 내딛던 그 소녀가 너무나 인상 깊었기 때문에, 그리고 하필이면 그 순간에 열여덟 딸기 같은 어린 내 순정에 대해 노래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년은 사랑에 빠진다. 줄창, 평생, 죽을 때까지 한 여자만 뼛골 빠지게 사랑하는 그런 사랑에 말이다.

 

  이 영화는 바로 그 소년 조강과 소녀 아리의 18년에 걸친 사랑 이야기다. 하지만 조강과 아리가 함께 지낸 시간은 채 1년도 되지 않는다. 아리는 늘 연기처럼 사라졌다가 어느 날 갑자기 조강의 앞에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10년 만에 불쑥 나타나서 수줍은 키스 한 번, 다시 8년 만에 불쑥 나타나서 사랑한다는 말 한 번을 남긴 채 다시 떠나려는 아리를 조강은 제대로 붙잡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아리가 금을 그었기 때문이다. 조강은 넘어오면 안 되는 금. 넘으면 끝이 되어버리는 그런 금말이다.

 

  이 금은 조강과 아리의 사랑에 존재하는 한계 같은 것이다. 조강은 아리가 어째서 자꾸만 자신에게서 도망가는지 알지 못하고, 아리는 조강에게 그 이유를 말하지 못한다. 그래서 둘은 서로 사랑하지만, 바짝 다가가서 서로를 마주보지는 못한다. 아리는 늘 금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조강은 그 금 바깥에서 바라만 보기 때문이다.  

 

  사실 아리는 어린 시절 교통사고를 당한 후, 수혈 과정에서 에이즈에 걸리는 불행을 겪는다. 그래서 어린 아리는 자신의 몸에 매우 나쁜 병균이 살고 있으며 이것은 자신에게 접촉을 하는 사람에게로 옮겨진다고 믿게 된다. 늘 노란 우비를 입은 채 자신은 저주받은 아이라고 이야기하며 사람들이 자신에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막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학교 친구들이 아리를 두려워하지만, 조강만은 늘 아리의 곁에 있다.   

 

  결국 아리는 조강의 옆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조강은 아리가 유별나게 좋아했던 초밥을 만들면서, 아리를 추억하며 살아간다. 조강은 처음 배웠던 순정이라는 것을 아리에게 그대로 바치는 셈이다. 

 

  하지만 이런 조강과 아리의 사랑이 그저 순수하고 순결하게 보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둘의 사랑은 비겁하다. 아리는 조강에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용기가 없어서 늘 엉뚱한 거짓말만 해댄다. 자신의 병을 밝힐 용기는커녕 조강을 위해서 완전하게 숨어버릴 용기조차도 없다. 그래서 몇 년 만에 한번씩 불쑥 나타나 조강을 흔들어놓고 다시 거짓말과 환상 속으로 숨어 버린다. 남아있는 고통은 온전하게 조강의 몫이다.

 

  조강 역시 현실을 직시하지도 않고, 현실로 뛰어들지도 않는다. 금을 넘으면 안 된다는 것, 언젠가 UFO가 오면 말없이 보내달라는 것, 조강은 그런 아리의 이야기들 뒤에 숨어있기만 한다. 아리가 떠나는 것을 못 견뎌하면서도 왜 떠나는지 묻지 못하고, 떠나지 못하도록 붙잡지도 못하고, 그어놓은 금 안으로 뛰어 들어가지도 못한다. 아리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조강은 아리가 어떻게 하면 괜찮아질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기보다는 UFO가 아리를 찾아올 수 있도록 miracle circle을 만들 뿐이다. 조강은 아리에게 순정은 바쳤는지 모르지만, 아리와 함께 병마에 맞서 싸우지는 않는다.

 

  두 사람이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현실을 외면해 버리느라 조강도, 아리도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진 못했다. 이런 사랑은 설사 아리가 죽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루어질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두 사람 모두 서로의 현실로 뛰어들기보다는 그저 그렇게 꿈만 먹으며 살았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그저 자신의 자리에 서서 꿈만 꾸고 있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꼬리를 자르고 달아나면, 자르지 못하는 곳을 붙들어 함께 있도록 해야 이루어지는 것이 사랑이다. 

  

  처음 <도마뱀>이란 영화에 대해 듣고 좋아하는 두 배우의 열연과 함께, 멋있는 사랑 이야기도 기대했건만 어느 쪽에서도 만족감을 얻지 못하여 이 영화는 그저 아쉬움으로 남는다. 

 

 

 

 

 

+) 그나저나, 강혜정. 확실히 예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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