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그리고, 지금 유시민을 생각한다. 본문

아무도 모른다/2009.01 ~ 2009.12

그리고, 지금 유시민을 생각한다.

dancingufo 2009. 7. 2. 03:21


유시민을 생각한다.

2009년 5월 29일, 노무현 대통령의 영결식이 있던 날이다. 그가 가는 마지막 길을 보기 위해 거리로 나온 수많은 사람들의 머리 위로, 숨막히는 더위와 쟁쟁한 햇볕이 사정없이 쏟아진다.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분노하고, 누군가는 쓰러지는 5월의 오후. 그 속에서 검은 정장 차림의 한 중년 남자가 맨바닥의 계단턱에 주저앉는다. 또 누군가 탈진했구나, 생각하며 돌아보면 낯설고도 익숙한 그 얼굴은 다름아닌 유시민이다.

유시민. 친노파의 핵심. 노무현을 사랑했고, 노무현으로부터 사랑받은 남자. 언제 어디서나 노무현의 편이었고, 노무현을 지키기 위해서 정치판에 뛰어든 노무현 지킴이. 그런 그가 노무현을 잃고 거리에 주저앉아 있다.

유시민을 발견한 사람들이 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생수를 건네며 휴지를 건넨다. 하지만 유시민은 그 모든 것을 받아들면서도 아무런 표정이 없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고 사람들이 주위에 몰려들어도 유시민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사람 같다. 결국 누군가 '쉴 수 있도록 가까이 가지 맙시다.' 말을 하자 사람들은 유시민을 둘러싸고 그늘을 만들어 준다. 마지막까지 한결같은 믿음과 신뢰를 가슴에 품었던, 유시민의 슬픔이 사람들을 움직이는 순간이다.

한동안 유시민에 대해서 생각했다. 실은, 유시민이 노통의 곁에 있었기 때문에 내가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걸 알고 있다. 만약 시간이 지나는 동안 유시민이 노통과 다른 길을 걸었다면 나는 이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유시민을 좋아한다.'라고 말하는 게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그런데도 유시민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은, 대신 울어줄 사람이 필요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라면, 울지 않기 위해서 생각할 무언가가 필요했던 건지도.


출세를 꿈꾸던 소년이, 바리게이트 앞에 선 청년이 되기까지

유시민은 경주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가난한 집안의, 2남 4녀중 다섯번째 아이였던 유시민은 가난이 싫어서 법관이 되려는 꿈을 꾸었다. 자신이 아는 한, 판사가 되는 것이 가장 빨리 출세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유시민은 누가 장래희망이 뭐냐고 물으면 판사라고 답했다. 그래서 유시민은 서울대 사회계열에 원서를 냈고, 어렵지 않게 합격을 했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간 후, 유시민이 가장 먼저 마주친 것은 생각하고 이야기 나누고 의문을 품는 것이 금지되어 있던 사회적 업악이었다. 그 억압 속에서 유시민은 공부하되 행동하지 않는 학생이 되었다. 유시민은 자신이 결코 행동할 수 없을 거라는 절망감에 빠졌고, 아무리 싸워도 유신 독재를 무너뜨릴 수는 없을 거라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것이 유시민을 행동하지 못하게 했고, 그래서 그는 냉소적인 태도를 유지한 채 신입생 시절을 보냈다. 

그러던 유시민이 판사의 꿈을 버리고 사회적 억압과 맞서 싸우길 택한 것은 대학교 2학년에 올라가던 무렵이다. 야학 선생이 되어 어린 노동자들의 생활을 엿보면서 유시민은 진정한 가난을 만났다. 그리고 굶고 살아본 적도 없고, 스스로를 먹여 살려야 했던 시절도 없었으면서 출세를 위해 나라의 녹을 먹는 판사가 되기를 희망했던 자신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래서 그는 법학과 대신 경제학과를 선택했고 그 때 처음으로 타협의 길 대신 투쟁의 길을 가기로 결정했다.

(어린 시절 이야기와 대학 시절 이야기는 유시민이 쓴 <서른살 사내의 자화상>을 참고하였다. 전문을 궁금해하실 분들을 위해 주소를 함께 올린다. 다만, 원본을 찾을 길 없어 유시민의 팬클럽 사이트인 '시민광장(http://usimin.co.kr/)에 올라왔던 글의 주소를 올린다.)

http://usimin.co.kr/2030/bbs/tb.php/ANT_T200/292260 : 유시민, <서른 살 사내의 자화상>

이후 유시민은 망설이지 않고 투쟁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 투쟁 속에서 평생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유신 체제가 무너지는 것을 목격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암살당하며 유신 체제는 무너졌고 그 속에서 유시민은 역사는 발전한다는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유신 체제가 무너져도 민주주의는 오지 않았다. 1979년 12월 12일, 정권을 장악한 것은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이었다. 이듬해인 1980년 5월,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고 유시민 역시 이 시위에 앞장섰다. 결국 5월 17일 당시 서울대학교 3학년 학생이던 유시민은 체포되었고 이 밤에 계엄군은 전국의 주요 도시를 점령했다. 구금된 지 석 달만에 석방된 후, 다시 강제로 군대에 끌려가 2년 8개월을 보내고 나온 유시민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여전히 군부 독재에 시달리고 있는 대한민국이었다. 


미농지 넉 장과 먹지 석 장의, <항소이유서>

유시민이 두 번째로 투옥된 것은 1984년 9월, 일명 '서울대 프락치 사건' 때이다. 이 사건은 유시민을 제도권에 데뷔시키는 계기가 되지만, 평생 동안 유시민의 뒤를 따라다니며 그를 괴롭히는 꼬리표가 되기도 한다.

'서울대 프락치 사건'이란 1984년 9월 17일부터 9월27일까지, 수사 기관의 정보원이라는 혐의를 받은 네 명의 가짜 대학생을 서울대학생들이 감금하고 폭행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알게 된 경찰은 수사에 착수해, 10월 4일 서울대 복학생 협의회 집행위원장이던 유시민을 구속했다. 유시민은 직접적으로 폭력을 가한 바가 전혀 없었으므로 미리 도피하지 않았고, 도피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장 먼저 체포되었다. 유시민은 폭력을 행사하기는커녕 이 사건을 알고 앰블런스를 불렀으며, 피해자들 중에는 유시민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는 결국 이 일로 인해 복교 이후 한달 만에 재수감되어 다시 재적을 당해야 했다.

<항소이유서>는 바로 이 때 유시민이 감옥에서 썼던 글이다. 역시 전문을 궁금해하는 분들을 위해 '시민광장'에 올라와 있는 글의 주소를 함께 올린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널리 회자되고 있는 명문의 글이므로, 읽어들 보시기를 권한다

http://usimin.co.kr/2030/bbs/tb.php/ANT_T200/331546  : 유시민 <항소이유서>
 
최근 이루어진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유시민은 이 글과 관계된 에피소드를 짧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참고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 예전에 읽은 내용들을 떠올리면서 이틀 반 동안 이 글을 썼다는 것이다. 총 10여 시간에 걸쳐 썼다는 이 글은 미농지 넉 장에 먹지 석 장을 끼워, 잉크도 없는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쓴 것이라고 한다. 밖으로 내보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는데도 이 글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유시민의 변호를 맡았던 이돈명 변호사 덕분이었다.

이돈명 변호사는 이 글을 읽고는 자신들만 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유시민의 누나인 유시춘을 불러 글을 보여주었다. 동생의 <항소이유서>를 읽은 누나는 이 글을 들고 나와 을지로 3가에 있는 인쇄소에 들러 급히 500부를 인쇄했다. 그리고 법원 기자실과 서울대 총학생회 등 몇 곳에 갖다 놓았는데 이것이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간 것이다. 놀랍게도 다음날 아침 눈을 떠보니 이 글은 월간 조선 광고문안에 버젓이 떠있었다고 한다.

(<항소이유서>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과정은 2005년, 유시춘 작가가 쓴 <익숙한 것은 감옥이다>라는 글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였다. 유시민의 '씨네 21' 인터뷰와 유시춘 작가의 글 <익숙한 것은 감옥이다>의 전문은 '시민광장'에 올라와있던 글의 주소를 함께 올린다.)
 
http://usimin.co.kr/2030/bbs/board.php?bo_table=ANT_T200&wr_id=328111 : 씨네21, 유시민 인터뷰
http://usimin.co.kr/2030/bbs/tb.php/ANT_T200/337217  : 유시춘 작가의 글, <익숙한 것은 감옥이다> 

이 사건으로 유시민은 다시 1년 동안 복역을 하고, 1986년 옥에서 나왔다. 그리고 유인물을 배달하고 독재타도의 구호를 외치는 삶으로 돌아갔다.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다.
 
1988년, 유시민은 당시 평민당 국회의원이던 이해찬의 보좌관으로 들어갔으며 이 인연을 계기로 노무현 대통령을 만났다. 2008년 이루어진 weekly경향과의 인터뷰에서 유시민은 당시 노통이 대통령감임을 한 눈에 알아봤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시절엔 자신이 일방적으로 노통을 좋아하고 존경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이 인연이 되어, 유시민은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결같은 태도로 노통의 곁을 지켰다. 

그 해, 유시민은 소설 <달>을 발표하며 작가로서 데뷔하는 동시에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출간했다. 이 두 글은 모두 1987년, 유시민이 수배 중이던 시절에 씌어진 것이다. 1991년, 대학에 입학한 지 13년 6개월만에 졸업을 하고 1992년에는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그곳에서 경제학을 공부하여 마인츠요하네스구텐베르크대학교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지만 1999년 박사 과정을 밟던 도중 생활고를 못 이겨 귀국했다.   

독일 유학 중이던 1994년부터 1996년까지는 한계레 신문의 독일 통신원이었으며, 귀국한 후 한국학술진흥재단 기획실장 겸 전문위원과 성공회대 교양학부 겸임 교수를 지내다가, 2000년 6월부터 2002년 1월까지는 MBC의 '100분 토론'을 진행했다.  

여기까지가 정치인이 되기 전의 유시민의 삶이다. 


다시 화염병을 들고 바리게이트 앞에 선 이유
 

유시민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 것은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서이다. 2002년 여름, 노통의 지지율은 바닥까지 떨어지며 노풍이 사라지고 있다는 여론이 일었다. 이런 여론 속에서 유시민은 집필 활동에 몰두하려던 당초의 계획과는 반대로 절필을 선언하고 정치계에 뛰어들었다. '후보 단일화 협의회'의 노무현 낙마 움직임을 예감하고 노통에 대한 반칙을 제지하기 위해 '다시 화염병 들고 바리게이트 앞에 서는 심정'으로 일어선 것이다.

이 시기에 유시민이 쓴 책이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이다. 주위 사람들은 그러지 말라고 만류했다지만, 유시민은 단 6주만에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이 책을 읽어보면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거대 언론과 노무현 대통령의 길고 긴 싸움의 역사를 알 수 있다. 더불어, 이 당시 유시민이 언론의 '노무현 죽이기'에 얼마나 분노하고 있었는지도 느낄 수 있다.

이후 유시민은 11월, 개혁국민정당을 창당하고 당의 대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창당 이전부터 민주당 내부의 '노무현 흔들기'에 반기를 들었던 개혁당은 창단과 함께 노통의 대통령 만들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젊고 새로운 개혁의 의지는 정치계에 새 바람을 일으켰고 이 바람은 결국 2002년 12월 19일, 노무현을 대한민국의 16대 대통령에 당선시켰다. 
 
노통이 당선 직후, 개혁당을 찾아 유시민을 가장 먼저 만난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유시민은 스스로 밝혔듯이 노통을 좋아하고 존경했으며, 그 마음 하나로 노통을 지킨 사람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노통도 당선되자마자 가장 먼저 유시민을 찾았을 것이다.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유시민은 당시를 기억하며, 2002년 12월 19일이 87년 6월 10일과 함께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밤이었다고 말한다. 


스타 정치인으로서의 삶

그렇게 유시민의 본격적인 정치 생활이 시작된다. 생각해보면 길지 않은 정치 생활이었건만, 그 시간 동안 유시민은 숱한 화제를 일으키고 숱한 어록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크게 이슈화되었던 사건 중 하나를 꼽자면, 2003년에 있었던 복장 문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2003년 4월 29일, 개혁당 소속이던 유시민은 국회 본회의에서 의원 선서를 위해 발언대에 나섰으나 정장 차림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부 의원들로부터 항의를 받고 선서를 하지 못했다. 이날 유시민은 넥타이를 매는 대신, 라운드 티 위에 쟈켓을 걸치고 나타났다. 이러한 옷차림을 한 유시민이 단상에 오르자 한나라당 의석에서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국회 의장은 이 상황을 정리하고자 '복장 문제에 관한 국회의 관례를 설명했고, 본인도 알겠다는 확답이 있었다.'라고 했으나 한나랑 의원 10여 명이 퇴장을 하고 결국 선서는 다음날로 연기되었다. 

국민에게 예의를 갖춰야 한다는 국회의원들의 말에, 유시민은 옷차람이 어떻게 예의일 수 있겠냐고 답했다. 그보다도 국회에서 싸우고 함부로 퇴장하고 하는 것이 더 예의에 어긋난다는 말을 덧붙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함께 선서를 하지 못한 의원들에게 미안하다는 뜻을 밝히며, 이튿날은 정장 차림으로 단상에 섰다. 그리고는 "오늘 제 옷차림이 마음에 드십니까?”라고 운을 떼는 유시민을 보면서 나는 괜히 웃음을 터트렸던 적이 있다.

유시민은 자신의 옷차림에 과민 반응을 보이며 선서식을 엉망으로 만든 의원들을 비아냥거리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고, 그의 행동은 그르지 않다고 여겼으며, 그의 태도는 재미있다고 느꼈다. 이후 유시민의 행동이 옳은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공방전이 뜨겁게 펼쳐졌지만 사실 나는 이 사건의 핵심이 '정장 차림이 국민에 대한 예의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도 주목해야 할 것은 유시민이 이때부터 보여준 스타 정치인으로서의 면모라고 생각한다.

넥타이 한 번 매지 않은 일로 해서 유시민은 각종 신문 1면에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올렸고, 수많은 네티즌들의 논란꺼리가 되었으며, '100분 토론'에서는 이 문제를 주제로 삼아 직접 유시민을 초청해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많은 정치인들이 국민에게 이름을 알리고 싶어하고, 신문 1면에 제 이름을 올리고 싶을 터인데 유시민은 단 한 번의 행동으로 이 모든 일을 해낸 것이다. 물론 유시민이 '튀기 위해서' 일부러 그런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아무도 하지 않는 행동을 혼자서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유시민은 어쩔 수 없이 '튀는' 정치인일 수밖에 없다.


절대 부적격자의 장관 취임식

사실 유시민은 지적인 동시에 행동력을 갖추고 있으며, 정계 최고의 입담가다운 언변력과 베스트셀러 작가다운 필력도 함께 가지고 있다.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스타성이나 어떤 상황에서도 신념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당당함 역시 유시민의 강점이다. 또한 유시민은 아무리 뒤져보아도 비리라든가 떳떳하지 못한 점을 찾아내기 힘든 깨끗한 정치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다방면에서 훌륭한 점을 가지고 있는데도, 그는 동료 의원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다. 유시민은 친구보다 적이 많은 사람이고 그래서 국회 안에서는 늘 반대나 야유, 집단 항의 같은 것을 받으면서 살았다. 그에 대한 주위의 평가가 어떠했는가 하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 있는데, 바로 유시민의 보건복지부 장관 취임과 관련된 일련의 소동들이다. 

2006년 1월 4일, 노무현 대통령은 유시민의 보건복지부 장관 내정 사실을 발표했다. 이 사실이 발표되자마자 한나라당에서는 유시민을 '절대부적격자'라 칭하며, 대통령이 오만과 독선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고 비난했다. 당시 유시민이 몸 담고 있던 열린우리당 역시 이 인사에 대해 찬성하는 목소리보다는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대통령이 당을 버리고 유시민을 선택했다라거나, 당보다 유시민을 낫다고 보는 것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코드 인사의 결정판, 차세대 지도자 키우기 등의 비난과 함께 여권은 대혼돈에 빠졌고, 야권은 자신들이 가장 미워하는 인물이 장관에 내정되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물론 열린우리당에서 유시민을 반대한 데는 차기 대권 주자를 경계한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감정적 반대 또한 만만치 않았다. 옳은 소리도 싸가지 없게 한다는 그의 특색이 수많은 적을 만들었던 셈이다. 결국 유시민의 보건복지부 장관 내정건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같은 목소리를 낸 보기 드문 사건이 되었다. 

하지만 그를 반대하고, 싫어하고, 절대부적격자라고 칭한 사람들도 부적격의 타당한 이유를 대지는 못했다. 위에서 말했듯이 유시민은 비리없는 깨끗한 정치인이었고, 그래서 아무리 뒤를 캐봤자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은 약 13개월 동안 국민연금 보험료를 연체했다는 사실 정도가 전부였다. 한나라당에서는 이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으나, 이 정도의 사실로 장관직 취임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노무현 대통령은 수많은 반대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유시민의 장관 임명을 강행했고, 그는 1월 6일 인사청문회를 거쳐 1월 10일 임명증을 수여받으며 보건복지부 장관 자리에 올랐다.

(유시민의 보건복지부 장관 취임과 관련된 이야기가 그가 가장 최근에 쓴 저서인 <후불제 민주주의>에 실려 있다. 재미있게 읽은 부분이라 소개하고 싶지만, 아마도 저작권법에 반하는 행동일 것이다. 궁금하신 분들을 따로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다.)


돌아온 지식 소매상

그렇게 어렵게 과천으로 향했던 유시민은 그곳에서 1년 3개월을 지낸 후, 2007년 5월 보건복지부 장관직을 사퇴하고 열린우리당에 복귀한다. 하지만 2008년 초, 자신의 소속당이 대통령을 쫓아내자 자신도 함께 당을 걸어나온다. 이후 무소속 의원으로 지내던 유시민은 2008년 4월, 18대 총선에서 대구 지역에 출마하며 또 한 번 이슈를 일으킨다.
(2002년 창당된 개혁당과 민주당 내 신당 추진파, 한나라당 탈당파가 통합하여 만든 당이 열린우리당이다. 2003년 11월 11일에 창단된 열린우리당은 2007년 8월 해체되며 열린우리당 탈당파 80명, 민주당 탈당파 4명, 한나라당을 탈당한 일부 세력이 모여 대통합민주신당을 창단한다. 대통합민주신당은 2008년 2월, 새천년민주당과 합하여 통합민주당으로 합당하면서 현재는 소멸하였다. 유시민은 대통합민주신당이 통합민주당으로 합당되는 과정에서 탈당하였다.)

유시민은 대구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으니 '대구 남자'라 할 만하고, 그러므로 대구 출마가 부자연스럽지 않다. 하지만 그곳이 전통적인 한나라당 텃밭이라는 사실은 유시민의 당선 가능성을 점칠 수 없게 했다. 사실 대구에서 출마하겠다는 것은 떨어질 것을 알고도 도전하겠다는 뜻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또한 유시민의 이러한 행동은 몇 번씩이나 낙선을 하면서도 부산에서의 출마를 고집하여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을 얻은 노통의 뜻을 이어가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예상했던 대로, 유시민은 낙선을 하지만 31.9%라는 만만치 않은 득표율을 보이며 그가 가진 가능성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이후, 유시민은 정치계를 떠나 원래의 직업이던 지식 소매상으로 돌아갔다. 경북대에서 강의를 하며 집필 활동에 몰두하는 동안 유시민은 사람들에게서 조금씩 잊히는 듯했다. 하지만 2009년 5월 23일, 대한민국을 충격에 빠뜨린 그 사람이 다시 한 번 유시민을 세상 밖으로 불러냈다.
 

침묵과 눈물, 다시 세상 밖으로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대통령은 봉화마을 부엉이 바위에서 떨어져 운명을 달리했다. 소식을 듣고 시신이 안치된 경남 양산 부산대 병원으로 달려간 유시민은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순간부터 눈물을 쏟았다. 일그러진 그의 얼굴 위로 카메라가 집중되었다. 그런 순간에 셔터를 누르는 기자들을 경멸하면서도 그렇게 찍힌 그의 사진을, 나는,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검찰의 무리한 수사가 죽음을 불렀다고, 이것은 명백한 정치적 타살이라고, 현 정권의 사과와 반성이 필요하다고 원망과 비판의 말이 쏟아지고 탄식과 오열이 흥건한 곳에서 유시민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유시민은 침묵을 지키면서 그저 눈물만 뚝뚝 흘릴 뿐이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아무런 말이 없는 유시민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유시민을 보면서, 언제 어디서고 저토록 고요한 유시민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는 생각을 문득 떠올렸다. 

모든 마음과 행동이 진정성을 의심받는 정치판에서도, 노통을 향한 유시민의 마음은 진정성을 의심받는 일이 드물었다. 그에게서 '리틀 노무현'을 엿보며 미래를 기대하던 사람들도, 줏대없이 그저 노무현만 따라다니는 '노빠'라고 욕하던 사람들도, 유시민이 얼마나 노무현을 좋아했는지에 대해서만은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그랬을까. 노통의 서거를 슬퍼하는 사람들도, 온 나라가 추모의 열기에 휩싸이는 것이 못마땅한 사람들도, 세상 밖으로 끌려 나온 유시민이 이 다음에 무엇을 할지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이는 세상에 오로지 단 한 명, 유시민 본인뿐인 듯했다. 
 
 
더 많이 성취하기 위해, 너는 먼저 모든 것을 잃어야 한다

노통이 서거한 지 사십일 여. 그 동안 유시민은 노통의 애도와 관련된 행보 외엔 그 어떤 행동도 보여주지 않고 있다. 몇몇 사람들은 그런 유시민을 답답해 하고, 조급증을 드러내며, 어서 당신의 다음 행보를 알려달라고 조르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그를 내버려두는 듯하다. 가끔, 지금의 이 시간이 유시민이 울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 시간이 지나면 더이상은 사람들이 그를 그냥 내버려두지만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체 게바라가 남긴 말들 중에 '더 많이 성취하기 전에, 너는 먼저 모든 것을 잃어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 유시민은 그 동안 많은 것을 성취했지만 여전히 성취하지 못한 것들도 있다. 물론 그것들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가 가장 사랑하던 것을 잃었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다. 다만, 모든 것이라 해도 좋을 만큼 커다란 것을 잃어버린 지금이야말로 아직 성취하지 못했던 것을 성취하러 나설 가장 좋은 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노통이 대통령에 당선되던 밤 기뻐서 울면서도 그 후의 시간 동안 그를 지켜보지는 못했다. 툭하면 그를 잊고 기억하지 않고 그에게 무관심해졌다. 단 한 번도 그를 비난한 적 없었다는 것은 변명이 되지 못한다. 5월 23일 이후, 나는 매일매일 절절하게 그에게 미안함을 느꼈고 그래서 다음에는 절대로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겠다 생각했다.

정치인을 좋아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대통령을 좋아하는 것 또한 그렇다. 하지만 만약에 유시민이 돌아온다면 어떨까? 다시 정치인을 좋아할 수 있을까? 이번에는 결코 그에게 미안해지는 일이 없도록, 언제든 그를 잊지 않고 기억하며 관심을 기울일 수 있을까? 현재의 나는 유시민에게 물어볼 것보다도 나에게 물어볼 것이 더 많다. 
 
지금 유시민은 상처입어 아프고 괴로울 것이다. 그래서 노통이 당부하셨다는 대로, 정치판을 떠나 강의하고 책쓰며 살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 대중들이 쉽게 유시민을 잊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사람들은 좋은 쪽으로든, 그렇지 않은 쪽으로든 유시민의 뜨거움을 쉽게 잊지 못할 것이다. 또한 여전히 뜨거운 유시민도 쉽게는 우리를 잊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그가 돌아올 거라 믿는다. 지금은 이곳으로 돌아오기 전, 마지막으로 침잠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이 끝나면 유시민이 돌아올 것이다. 돌아온 후에 신당을 창단하든, 민주당으로 복당을 하든 그것은 유시민이 선택할 문제이다. 대구에서 출마를 하든, 서울에서 출마를 하든 그 또한 유시민의 선택에 달려 있다. 나는 그저 조용히 유시민을 기다리기로 했고, 만약 그가 돌아온다면 이번에는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가 돌아올 즈음엔 나 역시 스스로에게 답을 줄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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