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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액츄얼리

dancingufo 2005. 5. 13. 02:27



심심하고 지루한 남자라고 생각했던 휴 그랜트의 얼굴에서, 이 시대의 권태나 영국신사의 나태함을 읽어낸 건 '어바웃 어 보이'에서였다. 자신의 딸의 대부가 되어달란 부탁에 나에겐 그런 자격이 없노라고. 너의 딸이 다 자라 열 여섯이 되면 밤새 술 마시고 같이 섹스를 할 거라고 태연히 말하던 그 얼굴에서 그가 게으르고 무성의한 표정을 짓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無味의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내가 휴 그랜트의 이름이 포스터에 새겨진 것만으로도 그 영화를 보고 싶어하기 시작한 순간.

로맨틱 러브 스토리를 감수하고서라도 내가 이 영화를 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그러니까 순전히 휴 그랜트 때문이었다. [어바웃 어 보이] 이후로 처음 나온 영화였고, 나는 이제 갓 휴 그랜트에 대해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참이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늘 그렇듯 비슷한 표정을 짓고서, 이번에는 영국의 수상이 되어 나타난 휴 그랜트를 보며, 생각을 한다. 당신이 이 시대의 표상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되고 싶어하는 류의 사람이 바로 당신이기 때문일 거라고. 쉬고 싶고, 웃고 싶고, 여유롭고 싶고, 울거나 화내고 싶지 않은 우리의 이상형이 바로 당신. 당신의 그 표정. 당신의 그 몸짓. 당신의 그 농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일 거라고.

휴 그랜트의 농담에는 힘이 있다. 우리를 쉬게 하는 힘. 우리를 웃게 하는 힘. 우리를 꿈꾸게 하는 힘.


TO ME, YOU ARE PERFECT.

영화속엔 가끔 기 막히는 대사가 나오곤 한다. 당신은 내게 완벽하다거나, 그러니 힘들어도 계속 할 거라거나. 프로포즈 할 때 써먹으면 얼마나 좋을 대사인가. 아니라면 어린 영화팬을 만족시킬 해리 포터 얘기도 있고, 나같은 축구팬을 웃게 하는 베컴의 오른 발과 왼 발도 얘기도 있지.

그렇지만 브리짓 존슨의 일기는 재밌었고, 빌리 엘리어트는 내게 최고의 영화였다. 어바웃 어 보이는 그 해 내가 손에 꼽는 영화 중 하나였고, 그리고 러브 액츄얼리는 바로 그 뒤를 잇겠다고 나온 영국 영화다. 가볍게, 그렇지만 진지하게, 영화팬들의 가슴을 두드리겠다며 자신만만하게 나선.

그런데도 러브 액츄얼리는 브리짓 존슨의 일기만큼 재밌지도 않고, 어차피 같은 로맨틱 해피 엔딩을 향해 간다해도 그 만큼의 솔직함도 보이지 않았으며, 빌리 엘리어트 만큼의 유쾌함과 기발함도 없고, 영화적 완성도도 그에 절대 못 미치는 수준이다. 어바웃 어 보이 만큼 냉소와 유머를 적절하게 배치하는 균형 감각도 없고, 간판으로 내세운 휴 그랜트의 매력도 그 만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사랑은 사실, 어느 곳에나 있다고 선전하고 있을 뿐. 누구나 동감할 만한 얘기를 나열하고 있을 뿐. 뇌리에 박히지는 않는다. 귓가를 맴돌다가 사라질 뿐이다.

크리스마스 날, 수상이 마을 하나를 다 돌아 뚱보 비서를 찾아내고 아이들의 연극 무대 뒤에서 키스를 나누다가 마침 커튼이 걷혀지는 바람에 사람들에게 들통이 나는 장면은 이 영화 최악의 장면. 휴 그랜트의 매력을 십분 깎아먹는 장면이기도 했다. 앞으로 내가 휴 그랜트의 이름만으로도 영화를 선택해야 할까, 고민하게 한 장면이기도 했고.

그나마 친구의 아내를 찾아와 고백하던 남자의 모습은 충분히 로맨틱했고, 첫사랑 소녀를 찾아 공항 게이트를 뛰어넘던 소년은 귀여웠지만, 포르투갈 여인을 찾아가 고백하는 남자의 모습은 진부하고, 사랑은 어디에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정신없이 나열했던 많은 주인공들의 이야기들은 결국 중간중간 길을 잃고 방황하다 서둘러 마무리를 짓는다.

아, 그래도 빌리였던가. 그 노가수의 캐릭터가 매력적이었다는 건 나도 인정.

천성적으로 로맨틱 러브 스토리같은 것에는 흥미가 없다. 그런 내가 이 영화에 기대를 걸었던 건, 제작진과 출연진이 내걸었던 포부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모든 참신함은 시간과 함께 결국 개혁이 필요한 구시대의 유물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진리. 영국이 가지고 나올 히트작은 부디 브리짓 존슨을 잊고, 빌리 엘리어트를 잊고, 어바웃 어 보이를 잊고, 러브 액츄얼리 역시 지운 후에, 그보다 훨씬 나은 참신함으로

가볍지만, 진지하고 솔직하게 나의 마음을 두드려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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