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하류인생 본문
01.
내 또래의 여자아이들은 대부분 조승우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마치 하나의 유행처럼 느껴질 만큼, 어디가나 그런 호감은 너무 눈에 익다. 물론 조승우는 그만한 호감 정도는 받아도 될 만큼- 괜찮은 배우다. 언젠가 친구 생일에, 불쑥- 나타났다가 사라진 이 배우를 현실에서 만난 일이 없었다면 나 역시 조승우를 지금보다는 더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스크린 속의 그가, 잠깐 내 현실로 걸어들어왔다가 사라졌을 때 난 스크린 속의 그에게 줬을 법한 호감을 원초적으로 봉쇄당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나는 조승우에게 참 무디다. 좋아할 법한 눈빛으로 말을 걸어오는데도 그 말이 잘 들리지 않는다. 어쩌면, 그렇게 크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는 것이 원래 조승우의 방식인 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02.
<하류인생>은, 제목이 좋다. '하류'라는 말이 좋다. 감독은 정신적 하류를 운운했지만, 난 어떤 기준으로 정신의 상류와 하류를 구분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정신의 맑고 탁함도 그렇다. 단지, 꼭 사람들의 기준에 따라 상류와 일류가 되기 위해 발버둥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내 마음가는 대로의 인생이, 남들에게 하류라고 불려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영화는 제목만큼의 매력이 없다.
03.
영화가 나빴을 리는 없다. 벌써 아흔 아홉번째 영화를 만드는, 말 그대로 장인의 솜씨다. 장인은 언제나 일정 수준 이상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인물이다. 이 영화에는 나름대로의 매력이 충분하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취화선>보다 재미있었다. 감독은 거침없이 영화를 진행시킨다. 인물의 호흡만 놓치지 않고 따라가도 영화는 금방 엔딩을 맞는다. 게다가 이 바닥에 뛰어든 지 벌써 7년이 넘은 배우는, 또 얼마나 멋지게 이 노련한 감독의 손길 안으로 스며들었는지. 배우 하나만 봐도 아까울 게 없는 영화다. 재미 하나만 느껴도 불평할 게 없는 영화다.
04.
그래도 50%의 만족보다는 50%의 불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영화. 하나- 여전히 성모 마리아 같은 여자. 강하며, 자애롭고, 따뜻하며, 현명하고, 화내지 않으며, 무엇이든 용서하는 여자. 둘- 변명. 사회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이야기하는, 나는 원래 정신이 맑은 인간이었는데 살아남기 위해 애쓰다보니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정신이 탁한 인간이 되었다는 변명. 셋- 불분명하고 애매모호하며 그래서 다소 우습기까지 한 정신의 맑고 탁함에 대한 이야기. 넷. 좀 더 끝간 데까지 밀어붙이지 못하고 어정쩡한 자리에서 멈춰서버린 듯한 주인공의 삶. 다섯. 그다지 마음 깊이 와닿지 않는 이 주인공의 변질.
05.
어떤 영화 평론가가 쓴 글 중에 굉장히 내 생각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김민선이 조승우에게 조승우의 변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씬의 대사가 굉장히 우스웠다는 것이다.
바람핀 조승우에게 화가 나서 가출을 했다가 돌아온 김민선은 부부관계를 맺지 않는다. 거기에 화가 난 조승우가 강제로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그 다음 김민선은 조승우에게 화를 내는 대신 평온한 표정으로 조승우의 옆에 누워서 '당신, 많이 변했어'라고 이야기한다. 순수한 것 하나 보고 결혼했는데 좋지 않은 일을 하다보니 사람 자체가 탁하게 변해버렸다는 것.
내가 이 씬이 우스웠던 것은 김민선의 표정이나 태도 때문이기도 했지만, 조승우가 원래 '맑은' 인간이었다는 데 내가 썩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승우는 원래 주먹 하나 믿으면서 사는 깡패였다. 살인이니 강도짓이니 그딴 걸 하지는 않았지만 썩 고매한 정신의 소유자도 아니었고 그런 환경에 처해있지도 않았으며 딱히 김민선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았다. 이 영화가 맑은 정신의 소유자였던 조승우가 어떻게 탁한 정신의 소유자로 변해가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면, 조승우의 맑은 정신과 탁한 정신을 좀 더 잘 보여줘야 했던 게 아닐까 싶다. 이 영화 초반부의 조승우와 후반부의 조승우는 그다지 달라진 게 없다. (정말이지, 이건 조승우의 연기 문제가 아니다.) 한 인간의 변질이 순수하게 사회 때문이라는 의견도 우습지만, 그 변질 자체가 제대로 표현되지 않은 상태에서 말로만 '맑음'과 '탁함'에 대해 얘기하기 때문에 이 씬은 내게 결정적인 '흠집'으로 남는 것이다.
06.
굉장한 악평을 듣고 보기 시작한 영화였는데, 보고 난 후의 소감은 그 정도의 악평은 분명히 억울한 감이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영화가 임권택의 영화라는 걸 생각지 않고 영화를 본다면 좀 더 제대로 감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 같은 경우엔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임권택'이라는 이름이 이 영화의 감상에 다소 방해가 되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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