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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루아, 내 생애의 아이들 본문

피도 눈물도 없이

가브리엘 루아, 내 생애의 아이들

dancingufo 2005. 10. 2. 02:21

내가 한참 아이에게 반해있을 무렵이었다. 나는 새벽부터 일과가 시작되는 그 토요일을, 저녁 7시까지 숨 돌릴 틈도 없던 그 토요일을, 식사 같은 걸 입에 댈 겨를이라고는 아무리 노력해도 만들어 낼 수 없던 그 토요일을, 단지 아이와 만날 수 있다는 이유 하나로 좋아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3, 4, 5, 6 학년. 고만고만한 또래 아이들을 상대로 하던 내게 아이는 처음으로 마주친 귀엽지 않은 아이였다. 아이는 훌쩍 키가 컸고, 아이는 비쩍 마른 몸을 하고 있었고, 아이는 어둡고 탁한 피부빛을 지녔고, 아이는 눈을 감은 채 감상하고 싶은 보드라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 방으로 들어서서 아이를 처음 만난 순간을 지금도 또렷히 기억하고 있다. 노트 가득 적어낸 아이의 글은, 우리 나라를 떠나 오래 외국에서 산 아이의 글이라고는 절대 생각할 수 없는 수준 높은 글이었고 나는 그 글을 읽어내려가는 동안 내가 단숨에 아이의 글솜씨에 반했음을 느꼈다. 나는 글을 다 읽은 후 달리 할 말이 없어 고개를 들어 빤히 아이를 마주보았다. 길고 얄쌍한 얼굴에서는 아이에서 어른으로 탈바꿈을 하고 있는 흔적이 엿보였다. 중국어가 익숙지 못해 두 살이나 아래인 아이들과 함께 수업을 듣고 있다는 아이는, 그러니까 중1로써 나를 만났지만 실은 열 여섯살이라는 것은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내가 다른 아이들을 귀여워하듯, 마냥 쓰다듬어주고 맛나는 것이라도 사다주며 아이를 이뻐할 수 없었던 것은 어쩌면 아이가 유난스레 컸기 때문이었나 보다- 라고, 그때서야 나는 생각할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조금 아이를 어려워하고 있었다. 아이는 가끔 유난히 수척해진 얼굴로 내 앞에 나타나고는 했다. 예민하고 약하며 몇년전부터 신경성 질환들을 앓고 있는 탓이라며 아이의 어머니는 내가 아이에게 이것저것 엄격하게 강요하지 않기를 바라셨다. 더 알려줄 것도 없는 녀석인 걸요. 지금도 저보다 더 나을 거예요. 때문에 엄격해야 할 이유도 없다며 나는 아이의 어머니께 대답하고는 했다. 한번 목소리를 높인 적도 없었고, 야단을 치거나 장난스레 등짝을 한번 쳐줄 일도 없었다. 다정하게 손을 잡아줄 일도 없었고, 불러내 맛나는 걸 사줄 일도 없었다. 그저 써놓은 글에 두어줄 칭찬을 적어주고, 가끔이나마 걸어오는 말들에 꼭꼭 웃음을 지어주고, 동료 선생을 만나면 한껏 아이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그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나는 늘 그렇게 아이에게 해줄 것이 없다는 박탈감을 느꼈지만, 아이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에는 늘 혼자 피식 헛웃음을 흘리고는 했다. 나는 아이가 자라나는 걸 보고 싶었다. 그것은 정말로 욕심을 부리지 않은, 나의 욕심 가득한 바람이었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말했을 때, 정작 서운함을 드러낸 것은 아이가 아니라 아이와 함께 수업을 해온 다른 녀석이었다. 뾰루퉁 입을 내밀고 툴툴거리는 말투에 내가 녀석들을 버려두고 가는 것 같아 조금 미안했고 조금 슬펐다. 그러는 중에도 아무런 말이 없는 아이를 보며, 이번에도 나는 피식 혼자 헛웃음을 흘렸다. 다행히도 아이에겐 조금도 미안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누구를 만나도, 어떤 선생님을 만나도, 칭찬과 사랑을 받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저녁식사를 함께 끝낸 후, 아이는 내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여보였다. 악수를 하자고 내민 손을, 두 손으로 맞잡아 왔을 땐 이 아이의 예의바르기까지 한 태도에 다시 웃음이 났다. 스무살이 되면, 선생님이랑 같은 이십대잖아요. 저를 늘 아이취급하는 내게, 4년만 더 기다려보라며 떼를 쓰곤 하던 것이 떠올랐다. 스무살이 되면 거창한 식사도 같이 하기로 했다. 멋진 선물도 주기로 했다. 그렇지만 나는 아이가 스무살이 되기 전에 아이를 떠나와야 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내게, 스무살의 아이는 없을 거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마음이 허해져서 밤거리를 한참 걷다가 돌아가야만 했다.





그러니까 '가브리엘 루아'의 [내 생애의 아이들]은, 누가 읽어도 좋은 책일 것이 분명하지만 아이들에게 연정을 품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마음에 남을 책이다. 나는 어떤 아이를 위해서도 최선을 다한 적은 없지만,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을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내 머리 속의 지식과 능력을 전달하기 위해 애쓴 적도 없지만, 함께 수업을 하는 동안 나의 아이들을 참 많이 예뻐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을 떠나왔고 다시 그 아이들을 만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 아이들이 나를 영영 잊고 지내는 동안에도 나만은 그 아이들을 차곡차곡 기억에 쌓아두고 살아가리라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다.

이 기억은 분명, 내 생애를 함께할 기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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