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2006년 5월 17일, 갇혀있는 나 본문
매일 아침, 지하철을 타고 학교 앞을 지나간다. 서서 창 밖을 내다보면 한참 공사가 진행중이다 싶더니 어느 새 건물이 높이 솟아있다. 저 건너편으로 고등 학교나 중학교가 하나 있었는데 높게 오른 건물에 가려 보이질 않는다. 생각보다도 나는 풍경을 좋아했던가보다. 이렇게 시야를 가리는 고층 건물에 실망스러운 마음이 되는 걸 보면.
그곳에서는 4년이나 5년쯤의 시간을 보냈을 뿐인데 나는 그 시간에 비하면 분명히 과할 그리움을 안고 산다. 무엇을 그렇게 애틋해하는 것인지 나도 모른다. 그 교정에 내리던 햇살이었던가. 비가 오면 비린내가 나곤 하던 호숫가였던가.
그래, 어쩌면 그것은 너의 하얀 얼굴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그 하얀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던 긴 속눈썹 같은 것일 수도.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지나가버렸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네가 조금만 더 오래 내 곁에 있었다면 나는 머지 않아 너를 미워하고 싫증내고 그래서 짜증을 부렸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다시 조금 울고 싶은 마음이 된다. 그래서 샤워를 하고, 세탁기를 돌리고,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욕실 청소를 하면서 다짐 비슷한 것을 한다. 울지 말자고. 칭얼대지 말자고. 못났지만 힘을 내자고 생각을 한다. 나, 이렇게 밖에는 안 되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만큼은 힘을 내자고.
청소기를 돌리고, 방을 닦고, 옷을 걸어 옷장 속에 넣어두고, 장미꽃이 담긴 컵 속의 물을 갈아준다. 그러고보니 장미꽃을 선물받은 것은 처음이다. 내가 좋아하는, 붉은 포장. 붉은 꽃. 붉은 냄새. 네가 그 때, 술을 마시고 있던 나를 불러 지하철 역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을 때 그 때 네가 들고 있었던 건 프리지아였던 것 같다. 제일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어? 라고 물었고, 아니. 장미를 가장 좋아하는데? 라고 나는 말했고. 그래서 아마 심술을 부린다고 너는 나를 툭- 하고 쳤지. 그래도 프리지아도 좋아, 라면서 나는 그 샛노란 꽃을 받아들었고.
그랬다.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것은 모두 지나가 버렸고 그 대가로 아름다워졌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 다행이다 싶어서 웃음이 난다. 네가 나에게서 지나가버린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내가 너를 이렇게나 오래,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고 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이야기를 듣고 있다. 그 때 그 자식, 나를 찾아왔더라고. 입대하기 전날이었는데 갑자기 집 앞에 와서는 밥 사달라길래 사주고... 왜 그랬는지 나도 모르지. 걔 나 싫어하지 않았어? 뭐, 나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 너의 이야기. 지나간 후에야, 듣고 있다. 그 때 너의 이야기.
알고 있다. 너는 나한테 부인할 수 없는 흉터다. 그 시간으로 돌아가면 나는 도저히 너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그 이후의 시간 동안 내내 그 흉터가 아무는 것만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 된 흉터니까 더는 아프지 않아. 그렇지만 자국은 남아. 그래도, 원망같은 것은 않고 이 흉터가 사라지길 바라지도 않는다. 어차피 누구나 흉터 하나쯤은 가지고 사는 거니까. 이런 거, 어차피 나만 가진 흉터가 아닌 거니까. 나도 너한테 흉터라도 좋으니, 남아있고 싶은 거니까.
그래, 그런 거니까. 괜찮다. 애닳아할 것 없다. 누구나 다 그렇게 사는 거니까.
사람들에게 불친절해져야겠다. 그 때 내가 가졌던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고 싶다. 너는 아마 미쳤냐면서 웃겠지. 그래도 난 네가 칭찬했던 그 모든 것들로 하여 다시 다른 사람에게 칭찬받고 싶지 않아. 다른 사람이 될 거야. 너를 만나던 때의 나와는 다른. 네가 알아보지 못할 만큼 많이 다른.
스물 여덟이다. 너는 빨리 결혼이 하고 싶다고 했고 빨리 가정이 가지고 싶다고 했고. 평범하게 그냥 회사를 다니는 회사원이 꿈이라 했고, 아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너는 스물 여덟쯤에는 혼자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그 때는 결혼을 해야겠다고. 그래서 생각이 났다. 스물 여덟이 되었다. 키가 크고 튼튼하고 강한 체 해도, 겁이 많고 외로움을 많이 타던 너는, 네 말에 조곤조곤 잘 웃어주는 듯 해도 사실은 당차고 똑똑한 여자를 만났으면 좋겠는데. 어차피 이제 내 곁에 없는 너라면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나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너는 겁이 많잖아. 진심을 늘 말하지 못했잖아. 그래서 늘 주위를 빙빙빙 돌기만 했잖아. 그러니, 잘 하고 있는 거니? 힘내서 하고 있는 거 맞아? 이렇게 네가 걱정이 된다.
그 시간 이후로 오랫동안, 네가 나의 오누이라도 되길 바랐으니까. 아마 그래서 이렇게 쌍동이 남동생을 생각하듯 너를 떠올리는 거겠지. 사실 늘 어깨를 빌려준 쪽은 너였는데 이제와서 내가 너를 돌보기라도 한 것 마냥, 이렇게 굴고 있어 우습지. 너에게선 벗어나지 않아도 좋으니까 그 기억에서는 벗어나고 싶었는데. 이렇게 떠나고 떠나도 다시 제자리.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 너를 좋아하고 있던 나를 만난다. 그렇게 좋아했는데 좋아한다고 말도 않고. 그렇게 좋았으면서 아무것도 안 했던. 그냥 너도, 내 마음도 방치해 두기만 했던. 그 때의 내가 아직도 그곳에 있다. 갇혀버린 것이다. 후회와 아쉬움과 미련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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