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2006년 7월 27일, 평형감각 본문
빗소리에 깼다. 분명 해가 떴을 텐데, 방 안이 어두웠다. 일어나서 불을 켜고 시간을 확인했다. 정오가 지나 있었다. 일찍 일어나기로 했었는데, 이미 늦어버렸다.
슬쩍 밖을 내다보니 누가 물을 세상으로 내다붓고 있는 것처럼, 빗줄기가 그랬다. 드셌고, 시끄러웠다. 이런 빗소리는 즐길 것조차 못되는군, 생각을 하며 창문을 닫았다. 하루종일 시끄러울 게 뻔하다 싶더니, 아니나다를까. 예상대로 하루종일 두두둑 거리는 소리에 머리가 아팠다.
전화가 울렸다. 한 통은 아빠. 한 통은 좋아하는 언니의 것이었다.
아빠는 비가 많이 와서 걱정이라고, 큰 언니가 한국에 들어온 것 아느냐고, 곧 밀양에 한 번 오라고 말씀하셨다. 비가 많이 오지만 집은 멀쩡하고, 언니는 아직 만나지 못했으나 곧 연락 오지 않겠느냐고, 8월 첫째주 주말에 별다른 일이 없으면 내려가보겠다고 말씀드렸다. 전화를 끊으면서 갑자기 왜 내려오라고 하시는 걸까, 생각해봤지만 뭐 별다른 일이 있으려고. 아마 아버지의 변덕일 것이다.
좋아하는 언니는, 전화했더니 전화기가 꺼져있길래 기사 보고 화가 나서 전화를 꺼둔 줄 알았다고 말했다. "보지도 못했어요." "얘기하지 말까?" "얘기해 주세요." 그리고 듣고보니 좀 어처구니도 없고, 어처구니 없어서 웃음도 나고. 그런 말을 대체 왜 하는 거예요? 라고 화도 냈다가, 뭐 그런 거죠, 라고 웃기도 했다가 그러다가 전화를 끊었다. 물귀신작전인 건가, 생각을 해보니 예전에도 똑같이 이런 적이 있었다는 게 생각났다. 문득 진저리가 쳐졌다. 나는 이제 미련도 없고 하니까 말이다. 너도 그 정도만 하고 끝내라고. 옆에 있다면, 따귀라도 한 대 때려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서 아쉬웠다.
오늘은 오랜만에 공부를 했다. 금세 졸리긴 했지만 그래도 금세 다시 깨서 하려던 곳까지 끝내놓고 나자 뭔가 으쓱 하는 기분이 되었다. 빨래도 돌리고, 청소도 하고, 앞부분 몇 장만 훑어보고 말았던 책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교보 싸이트에 들어가 책도 주문했다. 긴축재정이지만 할 건 하자, 라는 정신이 되었다기보다는 그냥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하던 것을 하고 싶다는 생각. 이제 그만 새 일자리도 알아봐야겠다는 생각.
모르겠다. 사람이 없어서 외롭고 믿을 수 없어서 불안하고 그런 것. 배신당한 것 같고, 버려진 것 같고 그런 기분이 드는 것. 좋은 관계, 라는 이름 안으로 자꾸만 침입하려고 드는 불순물. 반칙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반칙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다면 그러고 싶다. 단순하게 생각할 수 없다면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싶다.
내가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꾸 사람들에게 실망하는 것 같단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해서 아닌 것, 싫은 것, 허용할 수 없는 것을 넘어가게 되는 것도 싫다. 그런 것은 조금도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식으로 해서 유지시킨 관계란 절대로 튼튼할 수 없다는 것도. 대충, 이 되고 싶지는 않은 것 같다. 내 어디가 꼿꼿하다는 걸까, 그 땐 몰라서 생각해봤는데 이렇게 융통성없이 깐깐하게 구는 나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그 말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금요일이구나. 우왕좌왕하지 말고 힘내서, 중심을 잡자. 중요한 건 나만의 평형감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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