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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8월 14일, 기분 좋은 엄마 본문

아무도 모른다/2006.01 ~ 2006.12

2006년 8월 14일, 기분 좋은 엄마

dancingufo 2006. 8. 14. 05:19

01.

집에 앉아서, 예전 앨범을 들추다가 학창 시절 성적표가 후두둑 쏟아지기에 이것저것 펼쳐보았다. 그러다 점심 먹자는 엄마 말에 식탁으로 나가 앉아, 엄마와 함께 밥을 먹으면서 말했다.

"엄마, 중학교 때까진 성적표가 있는데 고등학교 때껀 왜 거의 없지?"
"니가 엄마한테 안 보여주고 어디다 숨겨놓은 거 아냐?"
"엄마가 성적 안 나왔다고 야단이라도 치고 했어야 숨기지."
"하긴 그것도 그렇다."

내 말에 엄마가 하하- 웃으셨다.

"근데 엄마. 나 내가 되게 공부 잘 한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안 잘했네?"
"왜 너 그래도 반에서 2~3등씩 했잖아."
"그것보다 못한 것도 많은데? 나는 내가 되게 잘한 줄 알고 살았어."
"그래도 니가 그나마 제일 잘했지."

얘길하며 엄마가 또 하하- 웃으셨다. 웃는 엄마를 보니까 기분이 좋았다.


02.

중국에 나가는 엄마와 함께 공항엘 갔다. 한번도 외국에 나가본 적이 없는 엄마는 내가 같이 공항에 가는 것이 뭔가 든든한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동생을 한 번 중국에 보내보면서 엄마는 수속 밟는 절차를 다 알아버린 모양이었다. 난 엄마를 쏙 빼닮았지만 확실히 엄마가 나보다 똑부러지는 데가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속을 일찍 끝내놓고 엄마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날 놔두고 총총총 사라지셨다. 한 10분이나 지났을까. 다시 저 멀리서 총총총 걸어오는 엄마가 보였다. 위아래로 초록색 옷을 입은 엄마가, 예뻤다. 그래서 엄마가 옆에 오자 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우리 엄마 되게 예쁘네."
"예뻐?"
"응. 멀리서 오는데 웬 예쁜 아줌만가 했다."

내 말에 엄마가 소리를 내며 깔깔깔 웃으셨다. 그렇게 웃는 엄마를 보자 기분이 좋았다.


03.

"못된 건 줄 아는데, 키도 작고 시커멓고 그런 남자가 말을 걸면 막 기분이 나쁘다니까. 키크고 덩치도 있고 좀 그런 남자가 말 걸면 괜찮은데 말이야."

웬만한 남자는 대화 상대도 안 된단 내 말에, 남자들이 어려서 그렇다고 대꾸하던 엄마가 무슨 고백이라도 하듯 그렇게 말했다. 그런 엄마 말이 우스워, 이번엔 내가 깔깔깔거렸다.

"너무하는 거 아냐? 사람 얼굴이 뭐가 중요하다고."
"그러게. 나도 나쁘다고 생각해서 고치려고 했는데, 그게 고쳐지겠냐고. 엄마 나이가 몇인데 이제 안 고쳐지지."
"그러니까, 엄만 누굴 탓할 게 없어. 엄마가 아빠 얼굴에 혹해서 결혼한 거 아니야."

내가 핀잔을 주자 엄마는 아니란 말도 않고 해실해실 웃으셨다. 해실해실 웃는 엄마. 어쩐지 소녀처럼 보여서 기분이 좋았다.  


04.

엄마와 같이 점심을 먹고 느긋하게 앉아있는데, 작은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할 이야기도 많고 하니 자기쪽으로 건너오란 용건이었다. 별로 언니와 만나고 싶지 않던 나는 인상을 쓴 채로 엄마에게 투덜거렸다.

"언니랑 만나면 허구헌날 내가 고민을 들어줘야 한다고. 이래뵈도 내가 동생인데 맨날 자기 얘기만 해. 언니만 그러나. 아빠도 그러고. 나는 왜 대체 고민 털어놓을 데가 한 군데도 없는 거야?"

나갈 준비를 하면서 투덜투덜거리자 엄마가 나를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거야, 엄마가 널 제일 공부 많이 시켰으니까 그렇지."

아니나 다를까. 엄마의 18번이 나왔다 싶었다.

"엄마가 시킨 게 아니라 내가 그냥 잘한 거야."
"어쨌든. 엄마 돈으로 대학갔잖아."
"대학가면 저절로 착해지고 철도 들고 그래?"
"그럼. 돈 들여 공부했으면 그 정도는 해야지."

단호하게 대답하는 우리 엄마. 그러니까 엄마가 늘 그렇게 믿고 계시니까 난 저절로 착한 척, 철도 든 척 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뭐라든 자기 생각은 확고하게 지키는 우리 엄마. 엄마가 아직 그런 단호함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을 보자, 기분이 좋았다. 

여러모로 기분좋은 엄마를 여러번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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