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2006년 8월 14일, 기분 좋은 엄마 본문
01.
집에 앉아서, 예전 앨범을 들추다가 학창 시절 성적표가 후두둑 쏟아지기에 이것저것 펼쳐보았다. 그러다 점심 먹자는 엄마 말에 식탁으로 나가 앉아, 엄마와 함께 밥을 먹으면서 말했다.
"엄마, 중학교 때까진 성적표가 있는데 고등학교 때껀 왜 거의 없지?"
"니가 엄마한테 안 보여주고 어디다 숨겨놓은 거 아냐?"
"엄마가 성적 안 나왔다고 야단이라도 치고 했어야 숨기지."
"하긴 그것도 그렇다."
내 말에 엄마가 하하- 웃으셨다.
"근데 엄마. 나 내가 되게 공부 잘 한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안 잘했네?"
"왜 너 그래도 반에서 2~3등씩 했잖아."
"그것보다 못한 것도 많은데? 나는 내가 되게 잘한 줄 알고 살았어."
"그래도 니가 그나마 제일 잘했지."
얘길하며 엄마가 또 하하- 웃으셨다. 웃는 엄마를 보니까 기분이 좋았다.
02.
중국에 나가는 엄마와 함께 공항엘 갔다. 한번도 외국에 나가본 적이 없는 엄마는 내가 같이 공항에 가는 것이 뭔가 든든한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동생을 한 번 중국에 보내보면서 엄마는 수속 밟는 절차를 다 알아버린 모양이었다. 난 엄마를 쏙 빼닮았지만 확실히 엄마가 나보다 똑부러지는 데가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속을 일찍 끝내놓고 엄마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날 놔두고 총총총 사라지셨다. 한 10분이나 지났을까. 다시 저 멀리서 총총총 걸어오는 엄마가 보였다. 위아래로 초록색 옷을 입은 엄마가, 예뻤다. 그래서 엄마가 옆에 오자 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우리 엄마 되게 예쁘네."
"예뻐?"
"응. 멀리서 오는데 웬 예쁜 아줌만가 했다."
내 말에 엄마가 소리를 내며 깔깔깔 웃으셨다. 그렇게 웃는 엄마를 보자 기분이 좋았다.
03.
"못된 건 줄 아는데, 키도 작고 시커멓고 그런 남자가 말을 걸면 막 기분이 나쁘다니까. 키크고 덩치도 있고 좀 그런 남자가 말 걸면 괜찮은데 말이야."
웬만한 남자는 대화 상대도 안 된단 내 말에, 남자들이 어려서 그렇다고 대꾸하던 엄마가 무슨 고백이라도 하듯 그렇게 말했다. 그런 엄마 말이 우스워, 이번엔 내가 깔깔깔거렸다.
"너무하는 거 아냐? 사람 얼굴이 뭐가 중요하다고."
"그러게. 나도 나쁘다고 생각해서 고치려고 했는데, 그게 고쳐지겠냐고. 엄마 나이가 몇인데 이제 안 고쳐지지."
"그러니까, 엄만 누굴 탓할 게 없어. 엄마가 아빠 얼굴에 혹해서 결혼한 거 아니야."
내가 핀잔을 주자 엄마는 아니란 말도 않고 해실해실 웃으셨다. 해실해실 웃는 엄마. 어쩐지 소녀처럼 보여서 기분이 좋았다.
04.
엄마와 같이 점심을 먹고 느긋하게 앉아있는데, 작은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할 이야기도 많고 하니 자기쪽으로 건너오란 용건이었다. 별로 언니와 만나고 싶지 않던 나는 인상을 쓴 채로 엄마에게 투덜거렸다.
"언니랑 만나면 허구헌날 내가 고민을 들어줘야 한다고. 이래뵈도 내가 동생인데 맨날 자기 얘기만 해. 언니만 그러나. 아빠도 그러고. 나는 왜 대체 고민 털어놓을 데가 한 군데도 없는 거야?"
나갈 준비를 하면서 투덜투덜거리자 엄마가 나를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거야, 엄마가 널 제일 공부 많이 시켰으니까 그렇지."
아니나 다를까. 엄마의 18번이 나왔다 싶었다.
"엄마가 시킨 게 아니라 내가 그냥 잘한 거야."
"어쨌든. 엄마 돈으로 대학갔잖아."
"대학가면 저절로 착해지고 철도 들고 그래?"
"그럼. 돈 들여 공부했으면 그 정도는 해야지."
단호하게 대답하는 우리 엄마. 그러니까 엄마가 늘 그렇게 믿고 계시니까 난 저절로 착한 척, 철도 든 척 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뭐라든 자기 생각은 확고하게 지키는 우리 엄마. 엄마가 아직 그런 단호함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을 보자, 기분이 좋았다.
여러모로 기분좋은 엄마를 여러번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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